회의는 예정보다 십 분 일찍 끝났다. 부장은 마지막으로 화면에 띄운 그래프를 가리키며, 이번 분기 기획안은 젊은 팀 위주로 다시 짜보자고 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반박할 말이 없어서라기보다는, 반박한다 해도 결과가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어서였다.
자리로 돌아오는 복도에서, 그는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옆모습을 잠깐 보았다. 정수리 쪽 흰머리가 요즘 들어 부쩍 늘어 있었다. 달라지는 건 없었지만, 그는 그 자리를 손끝으로 한 번 더 쓸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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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육 년 전, 그가 이 회사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모든 게 새로웠다. 야근을 해도 힘든 줄 몰랐고, 상사에게 혼이 나도 그날 저녁 소주 한잔이면 잊혔다. 그때는 자신이 언젠가 이 회사에서 가장 오래 일한 축에 속하게 될 거라는 상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지금 그는 팀에서 가장 나이 많은 사람이었다. 회식 자리에서 후배들이 나누는 농담을 반 박자 늦게 이해하는 일이 잦아졌다. 웃긴 걸 알고 웃는 게 아니라, 다들 웃으니까 따라 웃는 순간들이 늘었다. 그런 순간마다 그는 자신이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처럼 느껴졌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바카라상 서랍 안쪽에는 오래된 감사패 하나가 넣어져 있었다. 십 년 전, 그가 맡았던 프로젝트가 사내 우수사례로 뽑혀 받은 것이었다. 그는 가끔 서랍을 열다가 그 감사패와 눈이 마주치면, 몇 초쯤 멈춰서 그것을 바라보곤 했다. 그러고는 별다른 감흥 없이 서랍을 다시 닫았다. 그때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는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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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 그는 늘 타던 버스 정거장을 지나쳐 한 정거장 더 걸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조금 더 걷고 싶었다. 걷는 동안 그는 가로수 그림자가 길어지는 걸 바라보았다. 그림자가 길어지는 만큼, 하루도 저물어가고 있었다.
집에 가까워질수록 그의 발걸음은 조금씩 느려졌다. 현관문을 열면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뻔히 알기 때문이었다. 아내는 요즘 저녁마다 집에 없었고, 아들은 방문을 닫은 채였고, 어머니만 홀로 부엌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그 풍경이 나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딱히 반갑지도 않았다.
“다녀오셨어요.” 아들이 방에서 나오지도 않은 채 그렇게 인사말만 던지는 날이 많았다. 그는 그 인사에 “어” 하고 짧게 답하는 것으로 하루의 대화를 대신하는 날들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었다.
저녁을 먹고 나면 그는 대개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 채널을 이리저리 돌렸다. 딱히 보고 싶은 프로그램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냥 뭔가 켜져 있는 게 아무 소리도 없는 것보다 나았다. 열 시가 넘으면 그는 리모컨을 내려놓았다. 특별히 한 것도 없이, 하루는 그렇게 지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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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슈퍼는 그가 퇴근길에 가끔 들르는 곳이었다. 담배를 사거나, 아내가 부탁한 두부 한 모를 사거나, 특별한 목적 없이 들르는 날도 있었다. 그 슈퍼를 지키는 여자는 늘 비슷한 시간에 계산대에 앉아 있었다. 나이는 아내와 비슷해 보였다.
“오늘은 좀 늦으셨네요.”
그녀가 그렇게 말을 건넨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그는 순간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어색하게 웃었다. “아, 네. 회의가 좀 길어져서요.” 그녀는 별다른 대꾸 없이 그저 웃었다. 그 웃음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생각해보면 특별할 것 없는 인사였다. 그런데도 그는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으면서도, 그 짧은 대화를 몇 번이고 다시 떠올렸다. 누군가 그의 하루를 궁금해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에게는 오랜만의 일이었다.
그날 이후로, 그는 퇴근길에 넥타이를 조금 고쳐 매고 슈퍼 앞을 지나는 버릇이 생겼다. 딱히 누구에게 보이려는 건 아니라고, 그는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설명했다. 다만 슈퍼 유리문에 자신의 모습이 비칠 때면, 그는 자기도 모르게 걸음을 조금 늦추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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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그는 혼자 차를 몰고 나갔다. 목적지는 없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오래된 가요를 들으며, 그는 고속도로를 한 시간 넘게 달렸다. 어디로도 가지 않으면서 어디론가 가고 있다는 감각이, 그날따라 묘하게 편안했다.
휴게소에 들러 커피 한 잔을 사 마시며, 그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언제부터 자신이 이렇게 혼자 있는 시간을 찾아다니게 됐는지. 결혼하고 나서, 아이가 생기고 나서, 그는 늘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해왔다. 그 사이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게 무엇이었는지는, 오랫동안 물어본 적이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그는 다시 그 슈퍼 앞을 지났다. 불이 켜져 있었다. 들어갈까 잠깐 망설이다가, 그는 결국 차를 세우지 않고 그대로 지나쳤다. 지나치면서도 그는 백미러로 슈퍼 간판을 한 번 더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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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도 그는 가끔 그 슈퍼에 들렀다. 특별한 용건이 있을 때도, 없을 때도 있었다. 그녀는 늘 비슷한 방식으로 그를 맞았다. 특별히 다정하지도, 그렇다고 사무적이지도 않은 태도였다. 그런데 그 적당한 온도가, 그에게는 이상하게 편했다.
한번은 그녀가 그가 좋아하는 담배 브랜드를 기억하고 먼저 꺼내둔 적이 있었다. “이거 맞으시죠?”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고맙다고 했다. 별것 아닌 일이었지만, 집에 돌아오는 길 내내 그는 그 순간을 곱씹었다. 누군가 자신에 대해 사소한 것 하나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요즘 그가 가장 그리워하던 감각과 닮아 있었다.
집 앞 놀이터를 지나며, 그는 자기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다는 걸 뒤늦게 알아챘다. 곡조는 오래전 기타로 치던 노래였다. 그는 잠깐 멈칫했다가,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는 다시 그 노래를 마저 흥얼거렸다.
그날 밤, 귀가가 늦었던 아내는 취침 전 화장대 앞에 있었고, 그는 거울에 비친 아내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핸드폰 화면을 보며 웃는 아내의 옆얼굴이었다. 낯설다는 생각이 잠깐 스쳤다. 언제부터 이렇게 서로를 바라보지 않게 됐는지, 그는 답을 찾지 못한 채 시선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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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그는 여느 때처럼 넥타이를 매며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 얼굴은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그는 오늘따라 그 얼굴을 조금 더 오래 들여다보았다. 이 얼굴로 앞으로 얼마나 더 이런 아침을 맞아야 하는지, 그는 정년까지의 날들을 헤아려보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헤아려서 달라질 게 없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