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는 끝나도 몸은 때때로 오래 기억한다
사람은 헤어진다. 사진을 지우고, 메시지를 삭제하고, 연락처를 없애고, 함께 갔던 장소도 일부러 피한다. 시간이 지나면 그 사람을 생각하는 횟수도 줄어든다. 그리고 어느 날은 정말 다 끝났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뜻밖의 순간이 온다. 지나가는 사람에게서 익숙한 향기가 난다. 카페에서 오래된 음악이 흘러나온다. 누군가가 우연히 그 사람과 비슷한 말투로 내 이름을 부른다. 그러면 머리보다 먼저 몸이 반응한다. 심장이 조금 빨라지고, 가슴 한쪽이 이상하게 내려앉으며, 오래 전의 한 장면이 갑자기 현재처럼 살아난다. 분명 끝난 사랑인데 왜 몸은 아직 기억하고 있을까. 어쩌면 관계는 헤어진 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몸의 기억에서 천천히 사라지는 데까지 조금 더 긴 시간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기억을 흔히 머릿속에 저장된 정보라고 생각한다. 이름. 날짜. 사건. 장소. 그러나 사랑의 기억은 그렇게 깔끔하게 저장되지 않는다. 우리는 한 사람을 문장으로만 기억하지 않는다. 그 사람의 향기. 손의 온도. 잠든 모습. 목소리. 걸음의 속도. 포옹할 때 닿던 어깨. 함께 누워 있던 방의 빛. 이런 것들이 기억의 일부가 된다. 사랑은 생각으로만 경험한 사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몸으로 살아낸 시간은 몸의 방식으로도 남는다.
모리스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은 몸을 단순한 물질적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우리는 몸을 ‘가지고’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몸을 통해 세상을 경험한다. 나는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바라보고, 귀로 듣고, 몸의 거리와 움직임을 통해 타인과 관계 맺는다. 그렇다면 오래 사랑한 사람을 잊는다는 것은 생각 하나를 삭제하는 일이 아니다. 그 사람과 함께 만들어졌던 세계의 한 방식이 바뀌는 일이다. 항상 오른쪽에서 걸었던 사람. 밤마다 통화하던 시간. 잠들기 전 습관적으로 보내던 메시지. 아침에 일어나 가장 먼저 확인하던 이름. 이런 것들이 사라지면 몸은 한동안 갈 곳을 잃는다.
헤어진 뒤에도 무심코 휴대폰을 보는 이유가 있다. 연락이 올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특정 시간에 화면을 확인한다. 습관이다. 하지만 단순한 습관 이상일 수도 있다. 한때 내 몸이 그 사람의 존재를 기준으로 하루의 리듬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몸은 머리보다 느리게 이별한다. 머리는 말한다. “끝났어.” 그런데 몸은 묻는다. “그럼 내가 익숙했던 이 시간들은 어디로 가야 하지?”
앙리 베르그송은 시간을 시계로 측정되는 동일한 단위의 연속으로만 보지 않았다. 인간이 실제로 경험하는 시간은 과거가 현재 속에 스며드는 ‘지속’에 가깝다고 보았다. 사랑의 기억도 그렇다. 십 년 전 일이라고 해서 반드시 십 년만큼 멀리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기억은 어제 일보다 더 생생하다. 반대로 어제 헤어진 사람이 이미 먼 과거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마음의 시간은 달력과 다르다. 그래서 이별한 지 얼마나 되었느냐만으로 사람의 회복을 판단하기 어렵다. “벌써 1년인데 아직도?” 이 질문은 인간의 시간을 너무 시계처럼 보는 말인지 모른다. 어떤 사람을 보내는 데 필요한 시간은 달력이 아니라 마음이 결정한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는 마들렌을 차에 적셔 맛보는 순간 오래전 기억이 뜻밖에 되살아나는 유명한 장면이 있다. 기억은 우리가 일부러 찾을 때보다 냄새와 맛, 소리 같은 감각을 통해 갑자기 돌아오기도 한다. 사랑도 그렇다. “이제 생각하지 말아야지.” 다짐한다고 해서 기억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날 향수 냄새 하나, 계절의 공기 하나, 노래 한 곡이 닫아두었던 방의 문을 연다. 그래서 오래된 연인을 기억하는 일에는 조금의 무방비가 있다. 기억은 허락을 받고 돌아오지 않는다.
특히 몸을 나누었던 관계는 더 많은 감각의 기억을 남길 수 있다. 어떤 사람에게 섹스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한 사람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경험한 사건이다. 그 사람의 체온. 숨소리. 머리카락의 냄새. 안겼을 때의 느낌. 잠들기 직전의 표정. 그래서 관계가 끝났다고 이 모든 기억이 동시에 끝나는 것은 아니다. 몸이 기억한다는 말은 신비주의적인 표현만은 아니다. 우리의 기억에는 감각과 정서, 습관이 깊이 얽혀 있다. 그리고 사랑은 그 모든 층위를 지나간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요한 구별이 있다. 몸이 기억한다고 해서 아직도 그 사람을 사랑한다는 뜻은 아니다. 기억과 욕망도 다르고, 그리움과 재결합의 필요도 다르다. 가끔 과거가 떠오른다고 해서 다시 돌아가야 하는 것도 아니다. 사람들은 이 부분에서 혼란스러워한다. 예전 연인이 꿈에 나왔다. 갑자기 보고 싶었다. 그 사람이 쓰던 향수를 맡고 마음이 흔들렸다. 그러면 생각한다. “아직 사랑하는 걸까?” 꼭 그렇지는 않다. 기억나는 것과 돌아가고 싶은 것은 다른 일이다.
어떤 사람은 이미 떠나보냈지만 그 사람과의 한 계절은 여전히 아름다울 수 있다. 좋았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현재의 삶에 충실하지 못한 것도 아니다. 우리는 과거를 완전히 지워야만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지워지며 살아가는 존재보다 쌓이며 살아가는 존재에 가깝다. 사랑도 쌓인다. 이별도 쌓인다. 그리고 그 모든 경험이 지금의 나를 만든다.
폴 리쾨르는 인간의 정체성을 단순히 변하지 않는 하나의 본질이라기보다 자신의 삶을 이야기로 엮어가는 과정과 연결해 생각했다. 우리는 살아온 사건들을 해석하며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만들어간다. 그렇다면 옛사랑 역시 나의 이야기에서 완전히 제거할 필요는 없다. 그 사람은 떠났지만 그 관계를 통해 내가 사랑할 때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었고, 무엇에 상처받는지, 어떤 관계를 원하는지, 무엇을 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은지 배웠을 수 있다. 좋았던 사랑도 나를 만들고, 실패한 사랑도 나를 만든다. 끝난 관계가 반드시 실패한 관계인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랑이 영원해야 진짜였던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랑은 짧았지만 진실했고, 어떤 사랑은 오래되었지만 이미 오래전 마음이 끝나 있었을 수도 있다. 우리는 관계의 가치를 기간으로 평가하는 데 익숙하다. 10년이면 깊은 사랑. 3개월이면 가벼운 사랑. 하지만 인간의 경험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한 사람과 보낸 몇 달이 다른 누군가와 보낸 몇 년보다 더 깊은 흔적을 남길 수도 있다. 사랑의 깊이는 달력의 길이와 정확히 비례하지 않는다.
그러나 관계가 끝났을 때 우리는 종종 과거 전체를 부정하고 싶어진다. 특히 상처받았을 때 그렇다. “전부 거짓말이었어.” “내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싶어.”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분노는 때때로 헤어지는 데 필요한 힘이 된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난 뒤에는 조금 다른 질문도 가능하다. 정말 모든 것이 거짓이었을까. 끝이 좋지 않았다고 시작과 중간의 모든 순간까지 거짓이 되는가. 한때 서로 진심으로 웃었던 날까지 없던 일이 되는가.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