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섹스도 사랑을 묻는다

욕망하는 타인을 어떻게 한 사람으로 사랑할 것인가

byNavyblue

우리는 처음에 물었다. 왜 누군가를 욕망하는가. 몸이 먼저 사랑을 알아보는 순간을 이야기했고, 감춤과 금지, 아름다움과 욕망받는 몸, 여성과 남성의 욕망, 취향과 동의, 권력과 질투, 사랑 없는 섹스와 몸에 남는 기억까지 이야기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남는 질문은 의외로 단순하다. 우리는 서로의 몸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아마 『섹스의 미학』이 스무 번의 글을 돌아 결국 도착하고 싶었던 곳은 여기였는지도 모른다. 섹스는 몸의 문제이지만 몸만의 문제는 아니다. 욕망의 문제이지만 욕망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사랑의 문제이지만 사랑이라는 단어 하나로 모든 것이 정당화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섹스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원하는가.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질문. 당신이 원하는 사람을 당신은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플라톤은 『향연』에서 에로스를 결핍에서 출발하는 힘으로 보았다. 인간은 자기에게 없는 것을 원한다. 아름다움을 원하고, 사랑을 원하고, 완전함을 꿈꾼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에게 간다. 그 사람에게서 나에게 없는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그 사람과 가까워지면 내가 조금 더 완전해질 것처럼 느낀다. 사랑이 시작될 때 이 감각은 강렬하다. “저 사람과 함께 있으면 내가 조금 더 나다운 사람이 되는 것 같아.” 그러나 사랑은 어느 순간 중요한 사실을 가르친다. 상대는 나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 당신은 내 결핍의 부품이 아니다. 내 외로움을 해결하기 위한 존재도 아니고, 내 자존감을 회복시키기 위한 사람도 아니다. 당신은 나와 별개로 존재하는 한 사람이다. 사랑은 어쩌면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된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을 ‘빠지는 감정’보다 ‘할 줄 아는 능력’으로 보았다. 사랑은 저절로 찾아오는 감정만이 아니라 돌봄, 바카라임, 존중, 이해를 필요로 한다. 욕망은 자동으로 일어날 수 있다. 한 사람을 보는 순간 마음이 흔들릴 수 있다. 그 사람을 안고 싶고, 키스하고 싶고, 몸 가까이 가고 싶을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은 그다음에 시작되는 질문이다. 그 사람을 원하는 것뿐 아니라 그 사람의 삶까지 존중할 수 있는가. 욕망은 말한다. “당신을 갖고 싶다.” 사랑은 한 문장을 덧붙인다. “하지만 당신은 내 것이 아니다.” 이 한 문장이 욕망과 사랑 사이에 윤리를 만든다. 우리는 ‘내 사람’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내 연인. 내 남편. 내 아내. 내 사랑. 다정한 표현이다. 그러나 사랑은 소유격이 강해질수록 위험해질 수도 있다. “내 사람이니까.” 그다음 문장이 “내 말을 들어야 하고,” “나만 바라봐야 하며,” “내가 원할 때 응해야 한다.” 가 된다면 사랑은 어느 순간 소유권처럼 변한다. 그래서 레비나스의 철학이 사랑에 중요한 경고를 준다. 타인은 끝내 타인이다. 내가 다 알 수 없고, 내가 완전히 소유할 수도 없으며, 내 안으로 흡수할 수도 없는 존재다. 가장 가까운 순간에도 당신은 여전히 당신이다.


이것은 섹스에서 특히 중요하다. 두 사람이 옷을 벗고 서로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어도 하나의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나다. 당신은 당신이다. 몸이 만난다고 의지가 합쳐지는 것도 아니고 사랑한다고 내 욕망이 당신의 욕망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좋은 섹스에는 이 작은 거리가 남아 있어야 한다. 당신이 원하는가. 나는 원하는가. 오늘도 그런가. 이것은 낭만을 깨뜨리는 질문이 아니다. 오히려 사랑을 강요에서 구해내는 질문이다. 우리는 11화에서 동의를 이야기했다. 나는 그때 이런 결론에 가까이 갔다. 동의는 허락받는 절차가 아니라 상대를 하나의 주체로 인정하는 태도라고. 지금 돌아보면 『섹스의 미학』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 가운데 하나가 바로 자유였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에는 자유가 필요하다. 원할 자유. 원하지 않을 자유. 다가갈 자유. 멈출 자유. 말할 자유. 말하지 않을 자유. 그리고 떠날 자유까지. 이 말을 하면 사랑이 너무 불안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자유가 없는 사랑이 더 불안하다고 생각한다. 떠날 수 없기 때문에 함께 있는 것보다 떠날 수 있는데도 머무는 것. 그 선택 때문에 사랑은 의미를 갖는다.

6e52d6be42c741a5043067fabef3e1d7.gif사랑에는 자유가 필요하다.

사랑은 상대의 자유를 없애는 일이 아니다. 그 자유를 알고도 함께 살아가는 용기다. 그래서 나는 사랑의 가장 깊은 고백이 “절대 떠나지 마.” 가 아니라 “당신이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지만 오늘도 나와 함께 있어주어 고마워.”에 가까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소유는 확신을 원한다. 사랑은 불확실성을 견딘다.


조르주 바타유는 에로티시즘을 인간 존재의 경계를 넘나드는 경험으로 보았다. 우리는 모두 분리된 존재다. 아무리 사랑해도 완전히 상대가 될 수는 없다. 상대의 고통을 100퍼센트 느낄 수도 없고, 상대의 생각 속으로 완전히 들어갈 수도 없다. 그런데 인간은 그 거리를 견디기 어려워한다. 그래서 손을 잡고, 키스하고, 안고, 몸을 나눈다. 잠시라도 둘 사이의 경계가 사라진 것 같은 순간을 원한다. 어쩌면 섹스는 인간이 고독을 넘어서고 싶어 하는 가장 오래된 방식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섹스가 고독을 완전히 없애주지는 않는다. 13화에서 우리는 몸을 나눈 뒤 더 외로워지는 사람들을 이야기했다. 이유는 분명하다. 피부는 맞닿을 수 있지만 영혼까지 자동으로 만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은 몸을 안았지만 그 사람을 만나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제 섹스의 가장 깊은 실패를 오르가슴의 부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의 부재라고 생각한다. 몸은 있었는데 사람은 없었던 섹스. 상대가 무엇을 느끼는지 궁금하지 않고, 그 사람의 자유와 존엄보다 내 욕망만 중요한 섹스. 그것은 몸은 가까웠지만 두 사람은 만나지 못한 경험일 수 있다.


반대로 섹스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반드시 가장 강렬한 순간도 아닐 것이다. 상대의 표정을 살피는 것. 속도를 늦추는 것. “괜찮아?”라고 묻는 것. 그리고 상대가 “응.”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 짧은 말 안에 엄청난 것이 들어 있다. 나는 지금 당신을 원한다. 당신도 나를 원한다. 우리는 서로를 강요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순간 서로에게 자신을 내어준다. 이것은 작은 기적에 가깝다. 칸트는 인간을 단지 수단으로 대하지 말라고 말했다. 섹스에서는 이 윤리가 아주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나는 당신을 나의 쾌락을 위한 몸으로만 보지 않는다. 당신은 목적 그 자체다. 당신에게는 나와 만나기 전의 삶이 있고, 나와 관계없는 꿈이 있으며, 내가 모르는 상처가 있고, 내가 들어갈 수 없는 마음의 방도 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을 사랑하면서도 당신 전체를 소유하려 하지 않는다. 이것은 거리 두기가 아니다. 존중이다.


마르틴 부버라면 이것을 ‘나-너’의 만남이라고 표현했을 것이다. 사랑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상대가 나를 위한 ‘그것’에서 벗어나 하나의 ‘너’가 되는 순간이다. 섹스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당신의 몸을 보고 있다. 그러나 몸만 보는 것은 아니다. 그 몸 안에 살아온 한 사람을 본다. 흉터가 있고, 시간이 있고, 수치심이 있고, 자신감이 있고, 기억이 있다. 그래서 몸을 만진다는 것은 사실 한 사람의 역사를 만지는 일일 수도 있다. 이것을 깨닫는 순간 섹스는 조금 달라진다. 몸이 더 거룩해진다는 뜻이 아니다. 엄숙해져야 한다는 뜻도 아니다. 웃어도 되고, 장난쳐도 되고, 쾌락을 즐겨도 된다. 오히려 충분히 즐거워도 된다. 다만 잊지 않는 것이다. 내 손끝에 한 사람이 있다. 이 한 가지. 그것만 기억해도 많은 것이 달라진다.


종교는 오랫동안 섹스에 대해 많은 말을 했다. 하지 말아야 할 것. 허용되는 것. 죄가 되는 것. 정결한 것. 나는 종교가 왜 그토록 성을 중요하게 다뤘는지 이해한다. 성은 인간에게 강한 힘이기 때문이다. 기쁨을 줄 수 있지만 상처도 깊게 남길 수 있다. 생명을 만들기도 하고, 관계를 결합하기도 하며, 사람의 존엄을 훼손하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종교가 성을 금지와 죄의 언어로만 설명했을 때 중요한 것을 잃었다. 몸의 아름다움이다. 창세기의 첫 선언은 몸을 부끄럽다고 말하지 않는다. 인간을 창조한 뒤 “좋다”라고 말한다. 요한복음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신이 몸을 멀리한 이야기가 아니라 신이 몸을 입었다는 이야기다. 이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몸을 저급한 것으로만 말할 수 없다. 몸은 사랑하는 곳이고, 아파하는 곳이며, 눈물을 흘리고, 손을 잡으며, 누군가를 안아주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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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미학 저자. 남자인 나는 사랑을 철학으로 읽고, 지적인 여자를 추앙하고, 문장으로 감각하며, 삶의 아름다움을 미학으로 사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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