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바람 언덕과 상림공원에서 본 풍경

여름 풍경

by복기령 I can do it

새벽 네 시, 아직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천주산 주차장에 도착했다. 교수님과 여섯 명의 동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오랜만에 함께 떠나는 출사 여행이었다. 우리는 두 대의 차에 나누어 타고 감악산을 향해 출발했다.

도로에는 트럭과 승용차 한두 대만 드문드문 지나갔다. 창밖은 여전히 캄캄했지만 차 안은 이야기꽃으로 환했다. 오랜만에 만난 우리는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올여름은 어떻게 보냈는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웃고 이야기하다 보니 한 시간이 조금 넘는 길도 금세 지나갔다.


감악산 끝자락을 따라 한참 올라 도착한 곳은 방송국 통신 기지국이 있는 곳이었다. 차에서 내리자 새벽 공기가 얼굴을 스쳤다. 동료들은 기다렸다는 듯 카메라와 드론을 꺼냈다.


어둠이 조금씩 걷히고 산 너머로 아침빛이 번지기 시작했다. 드론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나도 드론을 띄워 떠오르는 해와 산자락을 담았다. 배터리 두 개를 다 쓰고 나서야 우리는 잠시 카메라를 내려놓았다.

이번에는 작은 아침 식탁이 펼쳐졌다. 누군가는 구운 계란을 준비해 왔고, 누군가는 과일을 꺼냈다. 따뜻한 커피와 보이차도 한 잔씩 나누었다. 새벽 출사길에 함께 먹는 음식은 무엇이든 특별했다. 카메라를 들고 같은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넉넉해졌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감악산 별바람언덕이었다. 아스타 국화축제를 준비하는 손길이 분주했다. 아직 꽃은 피지 않았지만 초록 잎 사이로 물줄기가 뿌려지고 있었다. 머지않아 이 언덕이 보랏빛 물결로 뒤덮일 모습을 상상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설렜다.

전망대로 가는 길에는 보라색 우체통과 무지개색 나무 의자가 줄지어 있었다. 전망대에 올라서자 저 멀리 산등성이 사이로 하얀 운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풍력발전기는 바람을 따라 천천히 돌고 있었다. 별바람 언덕은 초록빛으로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 속에 자리한 보라색 우체통과 무지개색 의자까지 어우러지니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아스타 국화가 활짝 피면 얼마나 더 아름다울까.’

마음속으로 가을의 풍경까지 미리 그려보았다.


출사를 마친 우리는 동백식당에 들러 뜨끈한 순두부찌개로 아침을 먹고 다시 함양 상림공원으로 향했다.

상림공원에는 여름이 아직 머물고 있었다. 넓은 연잎 사이로 연꽃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파란 하늘 위에 하얀 뭉게구름 몇 점이 둥실 떠 있었다. 연꽃과 파란 하늘, 하얀 구름을 한 화면에 담으니 그대로 한 장의 여름 엽서가 되었다.


​산바카라길을 걷는데 어디선가 시원한 물소리가 들려왔다. 졸졸 흐르는 계곡물 소리에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배롱나무에는 분홍빛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그 곁에서는 분수가 끊임없이 솟아올랐다. 햇빛을 받은 물방울이 반짝이며 흩어지고, 분홍빛 배롱꽃과 어우러졌다.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 분홍빛 배롱꽃과 쏟아지는 분수. 귀에는 물소리가 들리고 얼굴에는 시원한 물기운이 닿았다. 유난히 뜨거웠던 올여름이 그 순간만큼은 전혀 뜨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가던 길을 멈추고 물 한 바가지를 떠 목을 축였다.


“아, 시원하다.”


차가운 물 한 모금이 목을 타고 내려가자 온몸의 열기가 함께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다. 순간 어린 시절 여름날, 뛰어놀다 목이 마르면 시원한 물 한 바가지를 벌컥벌컥 마시던 기억까지 떠올랐다.

나는 다시 분수와 배롱꽃을 바라보았다.

이 여름 풍경이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계절이 바뀌면 연꽃은 지고 배롱꽃도 떨어질 것이다. 분수가 만들어 내던 반짝이는 물방울도 언젠가는 멈출 것이다. 그러나 오늘 내가 카메라에 담은 여름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사진 한 장 속에는 풍경만 남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새벽 네 시에 길을 나섰던 설렘, 함께 웃었던 사람들, 산등성이를 감싸던 운무, 파란 하늘의 뭉게구름, 분홍빛 배롱꽃과 시원한 물소리까지 그날의 마음이 함께 담긴다.

어쩌면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사라지는 것들을 붙잡아 두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뜨거워서 어서 지나가기를 바랐던 여름이었는데, 막상 아름다운 풍경 앞에 서니 마음이 달라졌다.

조금만 더 머물러 주었으면.

이 여름이, 이 풍경이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았으면.


여름은 뜨거움만 남기고 가는 계절이 아니다. 파란 하늘과 뭉게구름, 연잎 사이 피어난 연꽃, 분홍빛 배롱꽃과 시원하게 쏟아지는 분수처럼 마음속에 오래 머무는 풍경 하나쯤 남겨주고 간다.

계절은 붙잡을 수 없지만 그날 바라본 풍경과 함께한 사람, 그 순간 느꼈던 마음은 기억 속에 오래 남길 수 있다. 때로는 사진 한 장이 그 시간을 다시 불러오기도 한다.

지친 마음을 다시 시원하게 적셔준 여름 풍경이었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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