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과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디 아워스>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영화 <디 아워스>(2002)는 마이클 커닝햄의 장편소설 『세월(The Hours)』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이 영화의 중심에는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이 놓여 있다. 『댈러웨이 부인』은 영화 속 세 여성의 삶을 서로 연결하는 핵심 텍스트이며, 그녀들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 같은 역할을 한다. 영화는 한 권의 문학 작품이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삶에 어떻게 스며들고 영향을 미치는가를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디 아워스>는 문학이 인간의 삶과 상처를 어떻게 비추고, 또 어떻게 치유의 계기가 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문학치료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에는 세 명의 여성이 등장한다. 첫 번째 여성은 1920년대 영국 리치먼드에서 『댈러웨이 부인』을 집필하고 있는 버지니아 울프이다. 두 번째 여성은 1950년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살고 있는 평범한 주부 로라 브라운이다. 그리고 세 번째 여성은 2000년대 뉴욕에서 살아가는 출판 편집자 클라리사 본이다. 서로 다른 시대와 공간을 살아가는 세 사람이지만, 그녀들은 모두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한 권의 바카라으로 연결되어 있다.
영화는 작가와 독자, 그리고 소설 속 인물의 삶을 현실에서 반복하는 여성을 서로 겹쳐놓는다. 버지니아에게 글쓰기는 삶의 불안을 견디기 위한 행위이다. 로라는 독서를 통해 현실의 답답함에서 벗어나려 한다. 그리고 클라리사는 소설 속 인물의 삶을 현실 속에서 살아낸다. 영화는 문학이 단순한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지탱하고 변화시키는 힘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버지니아 울프라는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박인환의 시 「목마와 숙녀」에서였다. 중학생 시절 우연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박인희의 낭송을 들었고, 그 분위기에 이끌려 시집을 사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의 버지니아 울프는 그저 박인환의 시 속에 등장하는 어떤 외국 여성 작가 정도로만 느껴졌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가 『자기만의 방』을 읽으면서 그녀를 새롭게 만나게 되었다. 더 이상 낭만적인 분위기 속의 작가가 아니라, 여성의 삶과 글쓰기의 문제를 치열하게 사유했던 한 인간으로 다가온 것이다.
『자기만의 방』에서 버지니아 울프는 셰익스피어에게 재능 있는 누이동생 주디스가 있었다면 그녀 역시 위대한 작가가 될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울프의 대답은 냉정하다. 엘리자베스 시대에는 여성이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지녔다 하더라도 그것을 펼칠 수 있는 슬롯적 조건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주디스는 자신의 재능을 제대로 펼치지 못한 채 시대 속에 묻혀 사라졌을 것이라고 울프는 말한다.
그러나 울프는 또 다른 여성 인물인 메리 카마이클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메리는 재능뿐 아니라 약간의 유산도 가진 20세기의 여성이다. 바로 그 ‘약간의 돈’ 덕분에 그녀는 글을 쓰고 자기 삶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된다. 결국 주디스와 메리의 차이는 재능의 차이가 아니라, 경제적 조건과 슬롯적 환경의 차이였던 셈이다.
이 바카라에서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에게 필요한 것은 특별한 천재성이 아니라 ‘1년에 500파운드의 돈과 자기만의 방’이라고 말한다. 경제적 독립과 자기만의 공간이 있을 때 비로소 여성은 자신의 목소리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대학 시절 이 부분을 읽으며 큰 충격을 받았다. 대학원을 다니고 결혼과 육아를 경험하면서 그 의미를 더욱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영화 <디 아워스>는 바로 이러한 버지니아 울프의 문제의식 위에서 출발한다.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을 읽다 보면, 그녀가 단순히 여성주의 작가만이 아니라 인간의 우울과 불안, 기억과 상처를 매우 섬세하게 포착한 작가라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특히 『댈러웨이 부인』과 『자기만의 방』은 여성의 삶과 글쓰기의 문제를 넘어, 한 인간이 어떻게 상처를 치유하고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가를 질문하는 작품처럼 읽힌다.
『댈러웨이 부인』이 하루 동안의 이야기를 통해 클라리사 댈러웨이의 삶 전체를 보여주듯, 영화 <디 아워스> 역시 세 여성의 하루를 그리고 있다. 그러나 그 하루는 단순한 하루가 아니다. 영화는 하루라는 짧은 시간을 통해 그녀들의 과거와 상처, 욕망과 우울까지 함께 드러낸다.
영화는 다른 시대를 살아가는 세 여성의 삶을 병치와 반복의 방식으로 보여준다.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장면, 거울 앞에 서 있는 장면, 꽃을 만지는 장면, 아침을 시작하는 장면들이 반복된다. 그래서 세 여성은 서로 다른 인물이면서도 마치 한 사람의 다른 얼굴처럼 느껴진다.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 가운데 하나는 파티와 음식의 상징이다. 세 여성은 모두 누군가를 위한 파티를 준비하며 음식을 만든다. 그런데 그 음식들은 단순한 요리가 아니라 그녀들 자신의 또 다른 자화상처럼 보인다.
버지니아는 언니 바네사 벨을 위해 생강절임을 준비한다. 그녀는 굳이 하녀를 런던까지 보내 그것을 사 오게 한다. 왜 하필 생강절임일까. 생강은 원래 알싸하게 매우면서 강렬한 맛을 지닌 식재료이다. 그러나 설탕 속에 절여지면서 끈적하고 달콤한 음식으로 변한다. 그것은 마치 강렬한 개성과 예민한 감각을 지녔지만, 리치먼드의 고요한 일상 속에서 점점 생기를 잃어가는 버지니아 자신의 모습처럼 느껴진다. 또한 리치먼드에는 없고 런던에는 있는 음식이라는 점에서, 생강절임은 런던을 향한 버지니아의 그리움과 자유에 대한 욕망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로라는 남편의 생일을 위해 케이크를 만든다. 이 장면은 영화 전체에서도 매우 인상적인 장면 가운데 하나이다. 밀가루를 체에 치며 떨어지는 하얀 가루를 바라보던 로라는 아들에게 “아름답지 않니?”라고 말한다. 보통 사람들에게 밀가루는 단지 밀가루일 뿐이다. 그러나 로라는 그 평범한 밀가루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그것은 일상의 사물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시인의 감수성과 닮아 있다.
하지만 그렇게 감각에 몰입해 만든 첫 번째 케이크는 형편없이 찌그러지고 만다. 결국 그녀는 그것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요리바카라 사진과 똑같은 완벽한 케이크를 다시 만든다. 흥미로운 것은 그 두 번째 케이크가 오히려 로라 자신의 모습과 닮아 있다는 점이다. 노란 장미 장식은 남편이 사 온 꽃과 닮아 있고, 푸른 무늬는 그녀의 임부복과 비슷하다. 다시 말해 이 케이크는 슬롯가 요구하는 ‘완벽한 아내’로서의 로라의 자화상인 셈이다. 반면 그녀의 진짜 감각과 욕망이 담긴 첫 번째 케이크는 쓰레기통 속에 버려졌다.
나는 이 장면을 볼 때마다 1950년대 미국 슬롯가 여성에게 요구했던 규범을 떠올린다. 아름다운 집과 다정한 남편, 아이들, 그리고 완벽한 케이크. 겉으로 보기에는 행복하지만, 그 안에서 여성은 점점 자기 자신을 잃어간다. 로라가 읽고 있던 『댈러웨이 부인』은 바로 그 억압된 내면을 흔들어 깨우는 바카라이었다.
클라리사 역시 파티를 준비한다. 그녀는 에이즈에 걸린 시인 리처드를 위해 게 요리와 달걀 요리를 만든다. 게는 단단한 껍질 속에 여린 속살을 숨기고 있는 존재이다. 클라리사 역시 겉으로는 성공한 커리어우먼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상처받기 쉬운 인물이다. 리처드의 말 한마디에도 쉽게 흔들리고 무너진다. 영화 속에서 그녀가 두꺼운 외투와 선글라스, 장갑과 커다란 액세서리로 자신을 감싸고 있는 모습은 마치 단단한 게 껍질처럼 보인다.
이처럼 영화 속 음식들은 단순한 소품이 아니다. 생강절임과 케이크, 게 요리는 각각 버지니아와 로라, 클라리사의 욕망과 우울, 그리고 억압된 내면을 상징한다. 문학치료의 관점에서 보면 그녀들은 글쓰기와 독서, 그리고 반복적인 일상 행위를 통해 자신의 상처와 욕망을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영화 속 세 여성은 모두 사랑하고 또 사랑받고 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이상하게도 조금씩 어긋나 있다.
레너드 울프는 버지니아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그는 직접 출판사를 운영하며 아내의 작품을 출판하고, 병든 아내를 돌본다. 하지만 그 사랑은 동시에 버지니아에게 억압처럼 느껴진다. 보호받고 있지만 자유롭지는 않은 것이다. 버지니아는 사랑받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런던으로 돌아가 자유롭게 숨 쉬고 싶어 한다.
로라의 남편 댄 역시 다정하고 성실하다. 꽃을 사 오고 생일 파티를 기대하며 행복한 가정을 만들고자 한다. 그러나 로라는 그 사랑 속에서 점점 자기 자신을 잃어간다. 남편이 사랑한 것은 ‘행복한 아내’였지만, 로라는 그 역할 속에서 숨 막힘을 느낀다.
클라리사 역시 시인 리처드를 헌신적으로 돌본다. 하지만 그녀의 사랑은 끝내 리처드를 구원하지 못한다. 리처드는 『댈러웨이 부인』 속 셉티머스처럼 결국 스스로 삶을 마감한다.
영화는 끊임없이 죽음의 이미지를 반복한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버지니아가 죽어가는 새를 발견하는 장면이다. 그녀는 작은 새를 위해 꽃으로 장식한 침상을 만들어주고, 그 곁에 누워 죽음을 바라본다. 그런데 그 새의 침상은 로라가 만든 케이크와 놀랄 만큼 닮아있다. 노란 장미꽃과 둥근 형태의 침상은 마치 케이크처럼 보인다. 로라의 케이크가 그녀 자신의 자화상이었듯이, 죽어가는 새 역시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생기를 잃어가는 여성들의 내면을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버지니아는 죽어가는 새를 바라보며 『댈러웨이 부인』 속 셉티머스를 떠올린다. 셉티머스는 전쟁 후유증과 정신적 고통 속에서 살아가다가 결국 투신자살을 선택하는 인물이다. 그는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채 끝까지 예민한 감각과 순수한 영혼을 간직하고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클라리사 댈러웨이가 그의 죽음을 전해 듣는 순간 오히려 삶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는 점이다. 영화 역시 죽음을 통해 삶의 의미를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로라가 호텔에서 물에 잠기는 악몽을 꾸는 장면 역시 인상적이다. 침대 위까지 물이 차오르는 장면은 마치 그녀를 익사시키려는 듯한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이 장면은 훗날 버지니아 울프가 우즈 강에 몸을 던지는 장면과도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그런데 이 부분은 영화와 원작소설 사이에 중요한 차이가 있다. 영화에서는 로라가 마치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위해 호텔로 간 것처럼 묘사되지만, 원작소설 『세월』에서 그녀는 단지 혼자 바카라을 읽고 생각할 수 있는 공간을 원했을 뿐이다. 다시 말해 그녀가 원했던 것은 죽음이 아니라 ‘자기만의 방’이었다.
겉으로 보기에 로라는 부족한 것이 없어 보인다. 아름다운 집과 가족, 남편과 아이가 있다. 그러나 로라는 그 공간이 진정 자신의 공간이라고 느끼지 못한다. 그것은 가족의 공간일 뿐,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은 아니다. 그래서 그녀는 잠시라도 혼자 바카라을 읽고 생각할 수 있는 공간을 찾아 호텔로 향했던 것이다.
영화의 시작과 끝은 버지니아 울프의 죽음으로 연결된다. 그녀는 실제로 주머니에 돌을 넣고 우즈 강에 몸을 던졌다. 그런데 영화는 죽음을 단순한 비극으로만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죽음을 통해 삶과 자유의 의미를 역설적으로 묻는다.
영화 속 주인공들의 액세서리 역시 흥미롭다. 버지니아와 클라리사는 모두 호박 목걸이를 하고 등장한다. 왜 하필 호박일까. 호박은 나무의 수액이 오랜 시간 굳어져 만들어진 보석이다. 마치 마음속 응어리와 눈물이 굳어진 것처럼 보인다. 영화 속 호박 장신구는 오래도록 응어리진 감정과 상처를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반면 마지막 장면에서 늙은 로라는 진주 귀걸이를 하고 등장한다. 진주는 조개 속 상처를 감싸 안는 과정 속에서 만들어진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여성성과 모성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다. 로라의 진주 귀걸이는 어머니로 살아야 했던 시간과 그 안에 축적된 고통을 보여주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녀들은 영화의 제목처럼 '세월'이 만든 보석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영화 <디 아워스>를 보고 나면 세 여성 가운데 유난히 마음에 남는 인물이 생길 것이다. 어떤 사람은 버지니아의 우울과 예민함에 깊이 공감하고, 또 어떤 사람은 로라의 답답한 일상 속 공허에 마음이 움직인다. 혹은 클라리사의 외로움이 오래 남기도 한다.
왜 특정 인물에게 그렇게 강하게 끌릴까. 문학치료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단순한 감상이 아니다. 작품 속 인물이 자신의 무의식과 상처를 건드렸기 때문에 일어나는 반응이다.
앞 글에서 이야기했듯이 롤랑 바르트는 우리의 마음을 갑자기 찌르듯 건드리는 요소를 ‘푼크툼(punctum)’이라고 불렀다. 문학과 영화 역시 마찬가지이다. 어떤 장면이나 인물, 문장이 이상할 만큼 오래 마음에 남는 순간이 있다. 그것은 작품이 우리 안의 어떤 기억과 상처, 혹은 욕망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영화 속 세 여성에게 『댈러웨이 부인』은 바로 그런 작품이었다. 버지니아는 그 작품을 쓰며 자신의 삶과 우울을 견뎌냈고, 로라는 그 바카라을 읽으며 억압된 내면과 마주한다. 그리고 클라리사는 소설 속 인물의 삶을 현실 속에서 반복하며 살아간다. 『댈러웨이 부인』은 단순한 바카라이 아니라 그녀들의 삶을 비추는 거울이자 내면의 언어였던 셈이다.
어쩌면 누구에게나 그런 ‘인생작’ 한 편쯤은 있을 것이다. 힘들었던 시절 자신을 버티게 해 준 바카라이나 영화, 음악 말이다. 중요한 것은 작품의 유명함이 아니라, 그 작품이 내 마음의 어떤 부분을 움직였는가 하는 점이다.
문학치료란 결국 그런 질문에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이야기를 이해하는 일이 아니라, 그 작품을 통해 자기 자신의 삶을 다시 읽어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인생작은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