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 박호영, 김용택 등의 시
자화상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그림이 있다. 빈센트 반 고흐의 「귀를 자른 자화상」이다. 화가는 한쪽 귀에 붕대를 두르고 초점 없는 눈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진홍빛 배경은 창백한 그의 얼굴과 대비되어 활활 타오른다.
나혜석의 자화상도 있다. 사실 이 그림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었다. 먼저, 자화상이 아니라는 것. 실제로 둥글둥글한 화가의 얼굴과는 달리 그림의 여성은 각이 진 윤곽과 큰 눈의 서구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제작 연대도 확실치 않다. 대략 파리 유학 시절인 1928년 무렵으로 보기도 하고, 이혼 후인 1933년 경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렘브란트 역시 평생을 걸쳐 80여 점의 자화상을 남겼다. 특히 말년의 자화상에는 세월의 풍파를 견딘 한 인간의 슬픔과 평온함이 함께 담겨 있다.
케테 콜비츠도 여러 점의 자화상을 남겼다. 그중 인상적인 작품이 이마에 손을 얹은 자화상인데, 67세 노년의 모습을 그린 이 그림에서 콜비츠는 자신이 여전히 삶과 예술의 현장에 서 있음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조하리의 창
사람은 왜 끊임없이 자신의 얼굴을 그리려 하는가. 단지 외모를 남기기 위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자화상은 눈에 보이는 얼굴을 그리면서도, 동시에 보이지 않는 내면을 들여다보려는 시도이다. 문학 치료의 관점에서 보면 자화상은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자기 존재를 다시 이해하려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심리학자인 조셉 러프트(Joseph Luft)와 해링턴 잉햄(Harrington Ingham)은 인간의 자아를 네 영역으로 설명했다. 이른바 ‘조하리의 창(Johari Window)’이다. 여기에는 ‘나도 알고 남도 아는 공공 영역’, ‘나는 모르지만 남은 아는 맹목 영역’, ‘남은 모르고 나만 아는 사적 영역’, 그리고 ‘나도 남도 모르는 미지 영역’이 있다.
이 가운데 특히 중요한 것은 맹목 영역과 사적 영역이다. 맹목 영역은 남들은 보지만 정작 자신은 보지 못하는 모습이다. 많은 경우 그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모습에 가깝다. 반대로 사적 영역은 자신만 알고 남에게는 드러내지 않는 내면의 영역이다. 사람은 슬롯 속에서 일정한 역할과 가면을 유지하며 살아가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끊임없이 또 다른 자기 모습을 의식한다. 억압된 감정과 상처, 인정받지 못한 욕망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마음속 깊은 곳에 남아 있다가 때때로 불안과 우울, 분노와 자기혐오의 형태로 모습을 드러낸다. 문학 치료에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그림자를 먼저 인식하는 일이다. 자신의 내면에 낯선 모습이 존재함을 인정하는 순간, 사람은 비로소 자기 삶을 조금 더 온전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다시 화가들의 자화상으로 돌아가 보자. 고흐와 나혜석, 렘브란트와 콜비츠가 남긴 자화상은 단순한 초상이 아니다. 불편한 맹목 영역의 수용과 내밀한 사적 영역의 표출, 그리고 억압된 그림자의 인식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들이 자화상을 그리며 애써 전하고자 한 뜻이 무엇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은 그림을 통해 자신을 성찰하고 표현하며, 고통 속에서도 진정한 자기 모습을 찾고자 했다.
시의 거울 앞에 서다
시인은 시로써 자화상을 그린다. 윤동주와 서정주는 「자화상」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썼다. 윤동주는 우물 속에 비친 사나이를 미워하다 가엾어하고, 또 미워하다 그리워한다. 서정주는 스물세 해 동안 자신을 키운 것은 팔 할이 바람이라고 했다. 앞의 글에서 살펴본 것 같이, 이상은 거울 앞에서 시를 썼다. 시 「거울」에서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며 “근심하고 진찰할 수 없으니 퍽 섭섭하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기형도는 시 「질투는 나의 힘」에서 청춘의 불안과 자기혐오를 고백한다.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바카라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기형도, ‘질투는 나의 힘’ 전문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라는 기형도의 고백은 단순한 청춘의 감상이 아니다. 타인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고자 애쓰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내면의 고통을 드러낸다. 문학치료의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시 쓰기는 억압된 감정을 언어화함으로써 자기 삶을 다시 바라보게 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노년의 자화상 역시 깊은 성찰을 보여준다. 허영자는 시 「감」에서 나이 듦을 안정과 성숙으로 풀이한다. 젊은 날 떫고 비리던 피가 맑은 가을 햇살 속에서 붉은 단감으로 무르익는다고 했다. 그런가 하면 노년을 곧 젊음의 상실로 받아들인 시인도 있다. 홍윤숙은 시 「장식론」에서 여자가 장식을 하나씩 달아가는 것은 젊음을 하나씩 잃어가기 때문이라며, 젊음은 그대로가 눈부신 장식이라고 했다. 김종길은 시 「귀로」에서 하루를 성찰한다. 늙은 주제에 주바카라이나 떨지 않았는지, 허튼수작이나 늘어놓지는 않았는지, 남의 험담이나 하지 않았는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집에 돌아오는데 멀리 도봉산이 여윈 흰 이마를 높이 쳐들고 조용히 저녁해를 받고 있다. 시인은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에게는 도봉이 자신의 모습을 비춰주는 거울이었다. 박호영의 시 「거울 속의 나」는 이러한 자기 성찰의 과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오늘도 거울을 봅니다
하루 만에도 달라질 것 같은 내가
거울 안에 있습니다
흰머리가 몇 가닥 어제보다 늘고
이마와 눈가의 주름은
좀 더 깊이 파인 것 같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요
허나 정말 걱정인 것은
세상의 삶에 익숙해져
조금 더 비뚤고 허물어진 내가
거울 속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름 아닌
바로 나일 텐데 말입니다
나의 눈이 더 어두워져
거울을 볼 수 없기 전에
진정한 나와 마주치고 싶습니다
하여 어쩌면 지루한 일과일지 모르지만
내일도 거울 앞에 서려고 합니다.
-박호영, 「거울 속의 나」 전문
시인은 거울을 보고 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은 흰머리에 주름진 얼굴을 한 여느 노인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평범한 그 모습에서 특이하게도 “조금 더 비뚤고 허물어진 모습”을 찾는다. 이른바 그림자에 해당하는 모습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감추기에 바빴을 그 모습을 통해 ‘진정한 나’와 마주치고자 한다. 이것은 융이 말한 자기화 과정과도 닿아 있다.
문학치료에서 자기 이해란 밝고 긍정적인 모습만 받아들이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불안하고 미숙한 자기 모습까지 포함하여 삶 전체를 이해하려는 과정에 가깝다. 그런 점에서 시는 자기 삶을 비추는 거울이자, 자기 존재를 다시 읽게 하는 언어라 할 수 있다.
삶이라는 시
시 안에서는 청년과 노년이 서로에게 말을 건네기도 한다. 청년에게 노인은 의지하고 영원히 기억하고 싶은 큰 산과 같은 존재다. 젊은 시절 오탁번은 시 「어머니」에서 술도 안 마시고 담배도 안 피우고 밥도 많이 먹고 잠도 푹 자겠다며 마치 고해성사하듯 어머니께 다짐했었다. 윗세대인 할아버지 아버지를 잊지 않겠다고도 했다. 고뇌하는 청춘의 한 시절을 보내고 있지만, 자신의 뿌리는 명심하겠다는 고백이었다. 그런가 하면 노시인은 청년 세대에게서 과거 자신의 모습을 보기도 한다. 노동운동가로 유명했던 박노해는 시 「너의 하늘을 보아」에서 젊은 날의 자신을 대하는 것처럼 “힘들 때는 너의 하늘을 보라”며 청년들을 응원한다. 그리고 섬진강 시인 김용택은 시 「그랬다지요」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사는 게 삶이라고.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사는 게 이게 아닌데
이러는 동안
어느새 봄이 와서 꽃은 피어나고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그러는 동안 봄이 가며
꽃이 집니다
그러면서,
그러면서 사람들은 살았다지요
그랬다지요
-김용택, ‘그랬다지요’ 전문
삶은 늘 뜻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 우리는 수없이 흔들리고 후회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바로 그 흔들림 속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기도 한다. 시는 그 흔들리는 순간의 마음을 붙잡아 언어로 남긴다.
문학치료에서 시 읽기와 시 쓰기는 단순한 감상 활동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삶을 언어로 바라보는 과정이며, 흩어진 감정과 기억을 새로운 의미 속에 다시 배열하는 작업이다. 마음속에 막연하게 머물던 감정은 문장이 되는 순간 비로소 대상화된다. 사람은 그렇게 자기 삶과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자신을 다시 이해하게 된다.
이제 당신의 차례다. 시의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자화상을 그려보자.
-지금의 나는 어떤 모습인가?
-나는 어떤 모습을 감추고 살아왔는가?
-과거 혹은 미래의 나에게 지금의 내가 건네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
길게 쓰지 않아도 된다. 처음에는 세 줄이면 충분하다. 짧은 시도 좋고, 과거나 미래의 자신에게 보내는 짧은 편지도 좋다. 중요한 것은 잘 쓰는 일이 아니라 자기 삶의 목소리를 천천히 들어보는 일이다.
처음의 세 줄은 짧은 문장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그것은 자기 삶을 새롭게 읽기 시작하는 첫 장면인지도 모른다. 글이 글을 불러오듯, 시도 삶도 그렇게 조금씩 다음 문장을 향해 나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