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금치
"Help Popeye!“
1970~80년대 TV 애니메이션에서 구원의 상징이 된 비명 섞인 외침이다. 위기의 순간이면 등장했던 뽀빠이. 그리고 그 힘의 비밀은 언제나 시금치였다. 이것을 먹는 순간 팔뚝 근육이 불쑥 솟구치고 악당을 물리치던 뽀빠이는 당시 어린이들에게 정의의 사자 그 자체였다.
뽀빠이의 영향으로 시금치를 먹으면 힘이 세진다는 말이 정설처럼 떠돌았다. 오늘날 특정 건강식품이 유행하듯 시금치는 문화 아이콘이었다. 칭찬받기를 좋아했던 나 역시 그 말에 속아(?) 시금치나물을 입이 터질 듯이 집어넣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여기에는 흥미로운 과학적 배경이 있었다. 소고기를 구울 때 나오는 육즙은 산소 저장 색소 때문인데 그 색소의 중심 원소가 철분이다. 근육 내에서 힘이 필요할 때 산소를 신속하게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 뽀빠이가 시금치에 포함된 다량의 철분을 얻어 근육 에너지를 폭발시킨다는 설정이 이 원리였다.
그런데 열심히 시금치를 먹었던 나는 왜 뽀빠이처럼 되지 못했을까? 여기에는 '소수점 오류' 사건이 있었다. 독일의 화학자가 시금치 성분을 최초로 분석할 당시, 철분 함량의 소수점을 잘못 찍어 실제보다 10배나 높게 기록한 것이다.
오랜 시간이 지나 오류는 바로잡혔지만, 이미 시금치가 '힘'의 상징으로 각인된 후였다. 물론 오류와 관계없이 영양학적으로 우수한 채소임은 분명하다. 결국 이 사건은 시금치를 '울트라 슈퍼' 등급으로 격상시킨 유쾌한 과장이었던 셈이다.
이처럼 시금치를 둘러싼 소동이나 어린 시절의 환상도 흥미롭지만, 정작 진짜 모습은 따로 있다. 뜨거운 김이 서린 생활 현장에서 발견되곤 한다.
주방에서 아내가 시금치를 다듬고 있다. 흙을 털어내고 붉은 뿌리 끝을 살짝 씹어보고 한마디를 던진다.
"시금치가 아주 달착지근하네. 지난겨울 매섭게 춥더니만.“
이 말을 듣고 문득 시금치의 생애를 되돌아보았다. 참 별난 채소다. 대부분의 생명이 햇살 아래서 안락한 성장을 꿈꿀 때, 시금치는 한겨울의 고통을 정면으로 받아낸다. 추위 속에서 땅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제 몸 안의 전분을 잘게 쪼개 단맛 나는 당(糖)으로 바꾼다. 스스로 체내 어는점을 낮춰 얼지 않으려는 필사적인 생존 방식이다. 그 진한 달콤함이 투쟁의 흔적이며 온실 속 화초는 흉내 낼 수 없는 맛이다.
내가 지나온 시린 겨울도 나를 얼리기 위한 시련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쩌면 내 안에 숨어 있던 단맛을 끌어내기 위한 자연의 섭리였는지도 모른다. 성장이 멈춘 것 같았던 혹한의 계절에, 인내를 단맛으로 바꾸어낸 시간. 그것이 시금치가 우리에게 건네는 삶의 태도였다.
이번에는 아내가 팔팔 끓는 물에 소금을 살짝 넣었다. 그리고 바구니에 수북하게 쌓인 시금치를 한꺼번에 냄비 속으로 밀어 넣었다. 나는 깜짝 놀라 물었다.
"그걸 다 넣으면 넘치지 않겠어?“
뻣뻣하던 시금치는 뜨거운 물에 닿자마자 금방 기세가 꺾였다. 푸른 잎은 숨 죽으며 어느새 한 줌의 덩어리로 변했다. 그 많던 양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신기한 점은 그다음이다. 부피는 줄었지만, 식감은 훨씬 부드럽고 맛은 더욱 진해졌다. 물기를 짜낸 시금치에 참기름과 깨소금을 더하자 고소한 향기가 진동한다. 자신의 부피를 고집하지 않고, 현실의 뜨거움 앞에 내려놓은 결과다.
우리는 종종 '나'라는 존재의 부피를 키우는 데 급급하며 살아간다. 명예, 재력, 목소리의 크기 같은 외형으로 자신을 증명하려 애쓴다. 그러나 누군가와 어우러져야 하는 순간, 오히려 방해될 수가 있다. 진정한 성숙이란 뜨거운 세상에서 남과 섞일 수 있을 만큼 부드러워지는 과정이다. 시금치가 뜨거운 물을 만나 작아짐으로써 완성되듯, 작아져서 더 진해지는 맛이 사람에게도 있지 않을까.
저녁 식탁에 오른 시금치나물을 한 젓가락 입에 넣었다. 겨울을 견뎌낸 단맛과 뜨거움을 통과한 부드러움이 입안에서 어우러진다. 사람도 다르지 않다. 얼어본 자만이 단맛을 알고, 데워진 자만이 깊이를 얻는다. 시금치 한 접시가 건네는 위로 덕분에, 꽃샘추위의 서늘함조차 내 안의 당도를 높이는 시간으로 기쁘게 받아들여진다.
시금치는 비름과(科)이다. 파사초(波斯草)라는 채소가 유래되어 시금치가 되었다. 여기서 ‘파사’는 페르시아다. 뽀빠이는 Pop+eye의 합성어로 ‘튀어나온 눈’이라는 뜻으로 팝콘을 연상하면 된다.
시금치의 뿌리 끝부분이 붉은 건 추위를 견디기 위해 스스로 만들어낸 방어막이며 가장 달콤한 맛이 난다. 파종단계에서 수확까지 40~60일 정도 걸린다. 서늘한 기후에서 발아하며 잎이 지면에 바짝 붙어 월동한다. 낮의 길이가 길어지고 기온이 오르면, 번식을 위해 중심부에서 줄기가 올라와 개화하고 꽃가루가 바람에 날며 수분하며 씨앗을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