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만 무료

다섯 시선이 만나는 자리

같은 테이블에 앉으려면, 먼저 테이블이 있어야 합니다

by윤재호

회의가 끝난 뒤


2화에서 우리는 한 회의실에 모인 다섯 사람을 만났습니다. 같은 기술을 두고 저마다 다른 언어로 말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환자는 '절박함'의 언어로, 연구자는 '가능성'의 언어로, 기업은 '효율성'의 언어로, 규제자는 '안전성'의 언어로, 병원은 '현장'의 언어로 말합니다.


누구의 말도 틀리지 않았습니다. 환자가 절박한 것도, 연구자가 가능성을 좇는 것도, 규제자가 안전을 요구하는 것도, 기업이 효율을 따지는 것도, 병원이 현장의 판단을 앞세우는 것도 모두 각자의 입장에서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회의가 끝나고 다섯 사람이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면, 다음 대화는 어디서 이어질까요? 서로 다른 언어가 부딪힐 때 그것을 조정하고 합의할 자리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은 그 자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일본은 테이블부터 만들었습니다


일본재생의료학회(JSRM)는 일본의료연구개발기구(AMED)의 지원을 받아 국가재생의료컨소시엄(NCRM)을 운영합니다. NCRM은 여섯 개 모듈로 짜여 있습니다.


• 임상연구지원 모듈

• 인재육성 모듈

• 산업연계 모듈(산학연계, 재생의료이노베이션포럼 FIRM과 함께)

• 환자시민참여 모듈(PPI)

• 국제협력 모듈

• 적정성평가 모듈


https://www.jsrm.jp/fundings/amed/mgt/


이름만 훑어봐도 연구자, 병원, 기업, 시민의 얼굴이 하나씩 떠오릅니다. 야시로 모델의 다섯 주체를 각각 받쳐 주는 기능을 하나의 틀 안에 차례로 배치한 셈입니다.




https://conference.mpd.ac.jp/


테이블은 학회 안에만 있지 않습니다. '재생의료로 그리는 일본의 미래(再生医療で描く日本の未来)' 연구회는 정계·산업계·관계·학계의 이해관계자를 한자리에 모읍니다. 2024년도에는 재생의료의 제조·품질관리, 아시아 전개 전략, 보험의료 제도의 방향을 논의해 후생노동성·문부과학성·경제산업성에 제언서를 제출했습니다. 내각부와 AMED, 의약품의료기기종합기구(PMDA)도 함께합니다. 서로 다른 가치판단이 실제로 한 테이블에서 만나는 장면입니다.


https://firm.or.jp/


산업계도 자기 언어로 말합니다. FIRM은 재생의료 제품의 가치를 '임상적 가치'로만 재지 말고, 경제적·윤리적·산업적 가치까지 함께 평가해야 한다고 제언했습니다. '안전성'이라는 하나의 잣대로도, '지원'이라는 하나의 방향으로도 다 담을 수 없는 분야라는 뜻입니다.




학회는 테이블의 목적도 분명히 했습니다. 일본재생의료학회 니시다 코지 이사장은 2025년 한국인 환자 사망 사건 직후 낸 성명에서, 재생의료가 과학적 근거에 기반해 안전성과 윤리성을 확보한 형태로 '슬롯에 실장(社会に実装)'되도록 기여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승인이나 허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슬롯가 받아들이고 믿을 수 있는 형태로 자리 잡게 하겠다는 말입니다.


https://www.jsrm.jp/news/news-16721/




한국에서는 각자 먼저 움직이고 있습니다


한국의 사정은 어떨까요. 다섯 주체 가운데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시민, 그중에서도 환자입니다.

기대는 큽니다. 2012년 다섯 살의 나이로 세계 최초 소아 CAR-T 임상치료를 받은 에밀리 화이트헤드는 14년이 지난 지금 완치 판정을 받았고, 2023년에는 자신을 치료한 펜실베이니아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희귀·난치질환 환자에게 첨단재생의료가 '마지막 희망'일 수 있다는 기대를 줍니다.


https://www.emilywhiteheadfoundation.org/


그러나 불안은 기대보다 훨씬 무겁습니다. 1화에서 본 것처럼 일본 등으로 치료를 받으러 떠나는 환자는 연간 1만~2만 명으로 추산되고, 항공료와 체류비, 통역비까지 더하면 환자당 약 1억 원이 든다는 업계 추산도 있습니다.


https://www.sedaily.com/article/14163471


환자가 먼저 국경을 넘는 사이, 시장도 움직입니다. 포털에서 '첨단재생의료 실시기관 지정 컨설팅'을 검색하면 지정 신청부터 시설 준비까지 대신 해 주겠다는 업체가 쉽게 나오고, 대형 민간 보험사도 이 시장의 성장성을 살피고 있습니다. 정부도 2025년 12월, 퇴행성 관절염과 만성 통증처럼 해외 원정 치료 수요가 많은 질환을 대상으로 자가 줄기·면역세포 치료의 안전성과 효과를 확인하는 다기관 임상연구를 추진하겠다고 밝혔습니다.



환자는 떠나고, 시장은 앞서가고, 정부는 대응을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시민이 정말 궁금해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야시로 교수의 조사에서 일본 일반인의 74.1%는 '위험성'을, 59.8%는 '치료비(자기 부담액)'를 가장 큰 관심사로 꼽았습니다. 한국 시민도 다르지 않습니다. 기술의 가능성보다 '안전한가', '감당할 수 있는가'가 먼저입니다.


https://pubmed.ncbi.nlm.nih.gov/35620641/


문제는 이런 시민의 문제의식을 정바카라에 담아낼 통로입니다. 일본재생의료학회의 환자시민참여(PPI) 모듈 같은 구체적인 제도가 한국에는 아직 없습니다.




다섯 시선이 만나는 자리


첨단재생바이오법의 정식 이름은 「첨단재생의료 및 첨단바이오의약품 안전 및 지원에 관한 법률」입니다. 법 이름에 '안전'과 '지원'이 나란히 들어 있습니다.



이 연재가 말하려는 것은 둘 중 어느 쪽이 더 중요하다는 주장이 아닙니다. '투자를 더 해야 한다'거나 '안전관리를 더 강화해야 한다'는 한쪽의 목소리가 아니라, 서로 다른 가치판단을 한자리에 모아 함께 논의하고 결정해 나가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합의의 조건은 나라마다 다릅니다. 2화에서 본 6개국 비교 연구가 보여 주듯, 한국이 찾을 균형점은 미국이나 일본의 균형점과 같을 수 없습니다. 한국 슬롯의 경험과 가치, 의료 체계, 시민의 기대와 불안을 담은 한국형 균형점이 필요합니다.


ELSI는 그 대화를 위한 공통의 언어이고, 야시로 모델은 대화가 이루어지는 생태계의 지도입니다.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어느 한쪽의 승리가 아니라, 안전과 지원이 함께 설 수 있는 '균형의 자리'입니다.


다음 화부터는 그 자리에서 다섯 주체의 목소리를 하나씩 들어 봅니다. 순서는 비용을 부담하는 최종 이해관계자인 시민에서 시작해 병원, 연구자, 기업, 정부로 이어집니다. '비용을 지불하는 것은 시민이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은 전문가'라는 야시로 교수의 통찰을 따른 순서입니다. 10화는 그 첫 번째 목소리, 시민의 시선입니다.



이 글에서 다룬 이야기의 좀 더 자세한 내용과 출처는,

『첨단재생의료의 다섯 가지 시선과 ELSI』(BOOKK, 2026)에 정리해 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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