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장을 여러 번 찍었다. 장마다 한 번씩, 그리고 종이를 살짝 어긋나게 겹쳐놓고 그 사이에 걸치도록 한 번 더. 인주가 마르기 전에 옮기면 번지니까 한 장씩 넘기면서 기다렸다. 도장은 몇 해에 한 번 꺼낼까 말까 하는 물건이라 인주 뚜껑을 여니 가운데가 눌려 오목했다. 가장자리는 아직 붉고 가운데는 색이 옅다.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 날은 일 년에 한 번도 없다. 그래서 찍는 동안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세게 눌러야 잘 찍히는 것도 아닌데 매번 필요 이상으로 눌렀다. 다 찍고 나서 손끝에 빨간 게 묻어 물티슈로 닦았는데 손톱 옆에 조금 남았다.
이 서류는 며칠 전에 등기로 왔다. 초인종이 울리고 사인을 하고 받았다. 그때도 봉투였고 지금도 봉투다. 같은 길을 반대로 되짚어간다. 올 때는 두 부였고 갈 때는 한 부다.
두 부 중 한 부는 내가 갖고 한 부는 돌려보낸다. 내 몫은 바카라장 아래 칸에 세워뒀다. 나중에 다시 꺼내 볼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손 닿는 데 두었다. 나머지를 봉투에 넣었다. 입구를 접어 테이프를 붙이는데 한 번에 반듯하게 안 붙어서 떼었다가 다시 붙였다. 겉면에는 칸이 둘이다. 위 칸에 내 이름과 집 주소를 적고 아래 칸에 출판사와 편집부 담당자 이름을 적었다. 볼펜이 잘 안 나와서 두 번씩 덧그은 글자가 몇 개 있다. 내 주소를 손으로 또박또박 적어 남에게 보내는 일이 요즘은 드물다. 대개는 화면에 저장돼 있다가 알아서 따라간다.
봉투를 들어보니 가벼웠다. 종이 몇 장이라 그렇다. 무거울 리가 없는데도 들어보고 나서야 그걸 알았다.
우체국은 걸어서 갈 만한 거리다. 가는 길에 신호등이 하나 있고 그 앞에서 섰다. 봉투 접힌 자리가 바람에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오른쪽에 번호표 기계가 있다. 우편 쪽을 누르면 안에서 짧게 모터 소리가 나고 종이가 나온다. 얇아서 손에 쥐면 금방 구겨진다. 대기 의자에 앉았다. 벽에 붉은 전광판이 있고 대기 인원이 떠 있다. 세 명이었다. 가운데 포장대에서 누가 박스테이프를 길게 뜯었다. 찌익 하는 소리가 나고 잠깐 멈췄다가 또 났다. 종이 냄새와 풀 냄새가 섞여 있다.
창구는 세 개고 직원도 세 분이다. 몇 달째 다니면서 다 본 얼굴이다. 셋이 조금씩 다르다는 것도 안다. 한 분은 손이 빠르고, 한 분은 라벨을 붙이기 전에 겉면을 눈으로 한 번 더 따라 읽고, 한 분은 영수증을 어떻게 할지 묻지 않고 그냥 건넨다. 그런데 내가 누구 앞에 앉을지는 내가 못 정한다. 번호표가 정하고 전광판이 알려준다. 옆 창구가 먼저 비어도 내 번호가 아니면 앉지 못한다.
기다리는 동안 앞 번호 사람들을 봤다. 한 사람은 큰 상자를 올렸다. 옆면에 쇼핑몰 이름이 찍혀 있었으니 반품이었지 싶다. 다음은 나이 드신 분이었는데 창구 쪽으로 몸을 기울여 뭔가를 한참 물었다. 직원이 손으로 봉투를 짚어가며 설명했다. 다들 각자 다른 걸 보내는데 순서는 똑같다. 올리고, 묻고, 답하고, 붙이고, 결제한다. 안에 뭐가 들었는지는 여기서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반품인지 선물인지 서류인지는 겉에 적힌 것 말고는 드러나지 않는다. 저 상자 중에 누군가에게는 오늘이 특별한 날이라 보내는 것도 있을 텐데 여기서는 다 같은 무게 단위로 처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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