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당근?

byCOSMO

종이 쇼핑백 바닥이 네모나게 불룩했다. 바카라 세 권이 들어 있어서 그렇다. 한 권이 천 쪽 가까이 되는 것들이라 세워서 담으니 바닥이 견디지 못하고 그 모양대로 늘어났다.


바카라장을 정리하다 나온 바카라들이다. 오래 일하던 분야의 전문서인데 요즘은 들춰볼 일이 없다. 필요한 게 있으면 화면에서 찾는다. 검색창에 넣으면 몇 초 만에 나오고 그게 바카라보다 정확할 때도 많다. 종이를 넘겨가며 색인을 뒤지던 방식이 언제부턴가 몸에서 빠져나갔다. 어느 날 그만둔 게 아니라 조금씩 덜 펼치다가 안 펼치게 됐다. 그래도 버리지는 못하고 몇 해를 세워뒀다. 바카라장 한 칸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 칸이 아까워질 무렵에야 꺼냈다.


꺼내서 보니 표지 모서리가 닳았고 바카라배가 누렇게 변해 있었다. 몇 군데는 귀퉁이가 접혀 있다. 접은 자리를 펴봤는데 자국이 그대로 남아서 다시 접혔다. 무슨 내용이길래 접어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펼쳐서 읽어보면 알 텐데 그러지는 않았다. 읽기 시작하면 못 팔 것 같아서였는지, 그냥 귀찮아서였는지 잘 모르겠다.


바닥에 세워두고 위에서 사진을 찍었다. 값은 대충 정했다. 원래 가격의 십분의 일도 안 되게 적었는데 그게 아깝지는 않았다. 몇 해 동안 안 펼친 물건이라 값을 매기는 일 자체가 새삼스러웠다. 비싸게 부르면 안 팔릴 테고 안 팔리면 다시 바카라장으로 돌아간다. 그게 싫어서 낮게 적은 쪽에 가깝다. 올리고 금방 연락이 온다. 이번에도 하루가 안 걸렸다. 몇 시에 어디서 만날지 정하는 데 메시지 네댓 개면 충분하다. 서로 존댓말을 쓰고 이모티콘은 안 쓴다. 물건 이야기 말고는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연락은 한 사람만 오는 게 아니다. 이번에는 셋이었다. 먼저 온 사람에게 주기로 하고 나머지 둘에게는 죄송하다고 보냈다. 그쪽에서도 알겠다고 짧게 답이 왔다. 아쉽다는 말이 붙은 쪽도 있었다. 그러니까 만나지 않은 사람도 둘이다. 얼굴도 목소리도 모르고 메시지 두어 줄이 전부인데, 그 두 사람도 저녁마다 어딘가에서 이런 걸 팔거나 사고 있을 것 같다.


저녁에 나갔다. 해가 진 뒤라 가로등이 이미 켜져 있다. 상가 앞 가로등 밑에서 기다렸다. 약속 시간보다 일찍 나갔더니 서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쇼핑백 끈이 문제였다. 종이를 꼬아 만든 얇은 끈이라 무게가 그대로 손가락에 걸린다. 검지와 중지 사이 마디에 줄이 파고들었다. 손을 바꿔 들었다가 다시 바꿔 들었다. 바닥에 내려놓을까 하다가 말았다. 흙바닥이었다.


기다리는 동안 사람들이 지나갔다. 상가 앞이라 오가는 사람이 적지 않다. 편의점 문이 열릴 때마다 안내음이 났고 배달 오토바이가 두어 번 인도 쪽으로 붙었다 나갔다. 저쪽에서 누가 오면 잠깐 눈이 가고, 그냥 지나가면 다시 시선을 거둔다. 두어 번은 이 사람인가 싶어 자세를 고쳤다가 아니어서 도로 풀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니 다가오는 속도가 느려지는지만 본다. 기다리는 쪽에서 할 수 있는 게 그것뿐이다.


한 명이 걸음을 늦췄다. 스마트폰을 보면서 오다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이쪽은 쇼핑백을 들고 있고 저쪽은 폰을 들고 있다. 그게 서로를 알아보는 표시다. 이름을 부르지도 않고 손을 들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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