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지는 시간
어느덧 21년 달력도 마지막 장만 남았다. 12월 중순. 거리 곳곳에서는 캐럴이 심심치 않게 흘러나왔고, 사람들의 두꺼운 외투 깃 사이로는 연말 특유의 들뜨고 몽글몽글한 분위기가 배어 있었다.
처갓집 마당에서 백 포기의 배추와 씨름하며 크게 웃었던 그날로부터 벌써 한 달 남짓한 시간이 지나 있었다. 그날의 일은 두 사람 사이에서 이따금씩 꺼내어 웃는 기분 좋은 무용담이 되었다. 해수는 '난세의 영웅, 김장계의 헐크'라며 도윤을 치켜세웠고, 도윤 역시 그 칭찬을 여유롭게 즐기며 평온한 일상을 지냈다. 이후 한 달이 더 지나는 동안 도윤의 몸에 변화는 크게 없었다. 과거 그를 힘들게 했던 통증은 마치 겨울잠에 든 것처럼 조용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제자리를 찾은 듯했다. 하지만 도윤은 어렴풋이나마 느끼고 있었다. 기적처럼 주어졌던 이 길고 달콤한 일상이 사실은 언제 깨질지 모르는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과 같다는 것을.
며칠 전부터 도윤의 몸에는 미세하지만 분명한 변화가 찾아오고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뜰 때면 가뿐하게 일으키던 몸이 무겁게 가라앉을 때가 많아졌다. 출근길 지하철의 계단을 오를 때도 예전과 다르게 숨이 턱밑까지 차오르기도 했고, 밤이 되면 간간히 느껴지는 서늘한 한기에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웅크리곤 했다.
'조금 피곤해서 그럴 거야. 연말이라 업무가 몰렸으니까.'
도윤은 애써 스스로를 다독였다. 아직까지도 아침마다 자신의 안색을 살피는 해수 앞에서는 억지로 활짝 웃어 보였고, 욕실 거울 앞에서 창백해진 뺨을 두드리며 혈색을 만들어내려 안간힘을 썼다. 평범하게 찾아오던 이번 겨울을 따뜻하게 맞이하고 싶었고, 해수와 함께 보낼 크리스마스를 어떻게든 아무 일 없이 지켜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목요일 아침. 옷장 앞에서 남방 단추를 채우던 도윤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식은땀을 흘리며 잠을 뒤척인 때문인지 샤워를 하고 나왔음에도 몸은 수면상태에서 아직까지 깨어나지 않은 것 같았다.
"서도윤, 오늘 안색이 영 안 좋은데? 얼굴이 까칠해. 어디 아픈 거 아냐?"
침대 정리를 마친 해수가 다가와 도윤의 이마에 손을 가만히 얹었다. 살며시 이마에 얹힌 그녀의 손은 너무도 따뜻했다. 하지만 반대로 자신의 이마가 얼음장처럼 차갑다는 것을 느낄 수 있기도 했다. 도윤은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해수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 내렸다.
"괜찮아, 열은 없잖아. 요즘 부장님이 연말 실적 보고서 재촉하느라 늦게까지 괴롭혀서 피곤해서 그래. 당신이야말로 요새 송년 모임에, 올해 마무리 해야 할 업무까지 처리하느라 바빠서 고생이지. 너무 무리하지 마. 알았지?"
"난 끄떡없어. 자기가 걱정이지. 진짜 괜찮은 거 맞지? 너무 힘들면 오늘 연차 쓰고 좀 쉬어."
"정말 괜찮다니까. 참, 이번 크리스마스이브에 저번에 당신이 가고 싶다던 그 프렌치 레스토랑 예약 성공했어. 나, 잘했지!"
"진짜?! 와, 서도윤 정말 잘했네. 칭찬해! 오늘 목요일이니까 이틀만 잘 견디면 크리스마스네. 오늘도 수고해!"
현관에서 다정하게 손을 흔드는 해수의 모습을 바라보며, 도윤은 애써 웃음 지었다. 문이 닫히는 순간 끌어올렸던 입꼬리가 무너지며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현관문에 기대어 잠시 숨을 고른 그는,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고 집을 나섰다.
회사에서의 오전 업무는 그야말로 고역이었다. 모니터 화면을 쳐다보고 있으면 글자들이 이리저리 흩어지는 느낌이 들어 어지럽기까지 했다.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자리에 돌아온 도윤은 따뜻한 차를 마시며 억지로 정신을 붙잡으려 애썼다.
오후 3시. 키보드를 두드리던 도윤의 손가락이 갑작스레 딱딱하게 굳어갔다. 마치 한겨울 찬물에 손을 오래 담그고 있었던 것처럼, 손가락 전체가 감각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흡...?'
갑작스러운 증세는 손뿐만이 아니었다. 눈앞이 침침해져서 눈을 깜빡였지만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더니 바카라상 위의 물건들이 두 개, 세 개로 겹쳐 보였다. 호흡도 불편했다. 가슴 한가운데에 돌덩이를 얹어놓은 듯 숨을 쉬기가 버거워졌다. 단순히 과로로 인한 피로감이 아니었다. 처음 느껴보는 증상이 아님을 도윤은 깨달았다. 기억하기는 싫지만 몸은 이미 알고 있었다. 올봄 비상구 계단에서 느꼈던 바로 그 섬뜩한 전조증상이 다시금 그의 목을 조여 오고 있었다. 도윤은 떨리는 손으로 바카라상을 힘껏 짚고 몸을 일으켰다.
"서 선임님, 어디 가세요? 10분 뒤에 회의 시작인데." 옆자리의 후배가 의아한 듯 물었지만, 도윤은 대답할 기운조차 없었다.
"으응. 자, 잠깐 화장실 좀..."
간신히 새어 나오는 목소리로 대답을 쥐어 짜낸 도윤은, 비틀거리는 걸음을 옮겨 화장실로 향했다. 문을 열고 세면대 앞에 서는 순간,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왈칵 무언가가 뜨겁게 역류하는 것이 느껴졌다.
"컥... 커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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