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다섯 번째 이야기

터널의 끝

by추억바라기

해수는 심호흡을 크게 하고서 떨리는 손끝으로 일기장을 넘겼다. 날짜는 불과 며칠 전인 12월 중순에 머물러 있었다. 이전에 보았던 글씨들보다 확연히 힘이 빠져 삐뚤빼뚤하게 흔들리는 필체였다. 펜을 쥐는 것조차 힘겨웠을 도윤의 상태가 고스란히 전해져 해수의 마음을 울렸다.

새벽의 중환자실은 유독 느리고 무겁게 흘러갔다. 건조한 기계음과 섞여 들려오는 누군가의 힘겨운 숨소리만이 낯선 공간의 정적을 깨우고 있었다. 병원 복도의 차가운 형광등 불빛 아래 해수는 굳게 닫힌 중환자실 문 앞 대기석에 몸을 웅크린 채 앉아 있었다. 몸의 기운은 모두 빠져나가 보였지만 해수의 두 손만큼은 도윤의 낡은 가죽 일기장을 소중히 잡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멎어버릴 듯 위태롭던 도윤의 얼굴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려 심장은 쿵쾅거리며 뛰었고, 입술은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해수는 애써 쏟아지려는 눈물을 삼켜내며 감정을 누르고 또 눌렀다. 아직 다 읽지 못한 그의 진짜 마음이 이 낡은 일기장 안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도윤이 자신을 살리기 위해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자신의 삶을 깎아내려 갔는지, 슬픈 기적의 시작점이 어디였는지 온전히 알 수 있는 유일한 기록이었다.

일기장 속 내용을 통해 도윤이 자신을 살리기 위해 신에게 어떤 소원을 빌었는지, 자신의 췌장암을 거두어 가는 대가로 그의 수명이 어떻게 빠져나가고 있었는지 모든 진실을 뼈저리게 확인한 후였다. 하지만 해수는 일기장의 마지막 남은 몇 장을 마저 넘겨야만 했다. 죽음의 그림자가 턱밑까지 다가온 상황 속에서 그가 홀로 어떤 마음으로 오늘을 준비해 왔는지, 끝내 자신에게 전하지 못하고 삼켜야 했던 마지막 말들이 무엇인지 온전히 마주해야만 했다.

해수는 심호흡을 크게 하고서 떨리는 손끝으로 다시 일기장을 넘겼다. 이전에 보았던 글씨들보다 확연히 힘이 빠져 삐뚤빼뚤하게 흔들리는 필체였다. 펜을 쥐는 것조차 힘겨웠을 도윤의 상태가 고스란히 전해져 해수의 마음을 울렸다.

『2021년 12월 13일.

이제 정말 내게 허락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다. 시력이 자꾸만 흐려져서 거실에 앉아 있는 해수의 얼굴이 두 개로 겹쳐 보일 때가 많아졌다. 음식을 삼키는 것도 힘들 때가 많아졌고, 어제는 샤워를 하다가 그대로 주저앉아 한참을 일어나지 못했다. 내 몸 안의 세포들이 하나둘씩 전원을 끄고 깊은 잠에 빠져들 준비를 하는 것 같다. 오늘 오후에는 미뤄두었던 서재와 내 물건들을 조금 정리했다. 내가 떠나고 난 뒤, 해수가 내 짐을 정리하며 너무 오래 울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보험 서류들과 해수가 매달 납부해야 할 공과금 자동이체 목록도 파일에 깔끔하게 정리해 두었다. 덜렁대는 윤해수가 나 없이도 당황하지 않고 완벽하고 평온한 일상을 유지해야 하니까.』

해수의 시선이 문장 끝에서 오랜 시간 머물렀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꾹꾹 눌러쓴 글씨 위로 기어이 눈물방울이 떨어져 잉크로 스며들었다. 자신이 연말 마케팅 성과로 들떠 퇴근하던 그 평범한 오후에, 도윤은 홀로 시력이 흐려지는 눈을 비비며 자신의 죽음 이후에 남겨질 아내를 위해 공과금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2021년 12월 17일. 해수가 잠든 틈을 타서 몰래 크리스마스 레스토랑을 예약했다. 어쩌면 그날이 우리가 함께 보내는 마지막 기념일이 될지도 모르겠다.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고, 아프지만 잠든 해수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신기하게도 견디기 힘든 통증조차 잊어버리는 것 같다. 4년 전, 췌장암 판정을 받고 뼈만 앙상하게 남았던 해수가 지금 이렇게 맑은 얼굴로 새근새근 편히 잠자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신에게 내어준 내 남은 수 십 년의 세월이 단 1초도 아깝지 않다.

해수야. 내 사랑하는 해수야. 네가 이 일기장을 읽을 때쯤이면, 나 때문에 많이 울고 있을까 봐 그게 제일 걱정이야. 하지만 해수야, 절대 자바카라하며 네 일상을 무너뜨리지는 마. 내가 너에게 준 건 갚아야 할 희생이나 빚이 아니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기쁜 일이었어. 그러니까 내가 남긴 이 시간들을 무거운 짐처럼 느끼지 않았으면 해. 그저 매일 아침 마시는 따뜻한 커피 한 잔에 기분 좋아하고, 맛있는 걸 먹으며 편안하게 웃어주면 돼. 길을 걷다 기분 좋은 햇살이 비치거나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올 때, 내가 네 곁을 스쳐 지나간다고 생각해 줘. 나의 부재가 널 너무 오래 아프게 하지 않기를 바래.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내 빈자리에 익숙해지며 네가 다시 마음 편안한 행복을 찾았으면 좋겠어. 내게는 언제나 네가 웃는 게 가장 큰 행복이었으니까.』

마지막 문장 위로 참고 있었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이 나쁜 놈아... 나만 혼자 두고 가면, 내가 어떻게 웃으면서 살아... 어떻게 나 혼자 행복하라고..."

해수는 떨리는 손으로 일기장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고선 소리 내어 울지 않으려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도윤의 글에는 그 어떤 원망이나 두려움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덮쳐오는 통증 따위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 오직 해수의 행복한 내일만을 위해 자신의 남은 시간을 기꺼이 지불하고 있었다.

자신이 누려온 이 완벽한 건강과 평온한 일상이 모두 도윤이 덜어낸 시간들로 채워져 있었다는 사실에 해수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하지만 하염없이 밀려들던 슬픔과 미안함은 이내 그 무엇으로도 꺾을 수 없는 단단한 다짐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녀는 눈물로 젖은 뺨을 닦아내며 일기장을 품에 꽉 끌어안았다. 도윤은 오직 그녀를 위해 홀로 끝을 맺는 것으로 이 슬픈 기적을 완성하려 했지만, 해수는 그가 남겨둔 슬픈 결말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도윤이 기꺼이 자신에게 눈부신 내일을 선물했다면, 이제는 그녀가 멈춰가는 그의 시간을 어떻게든 다시 흐르게 할 차례였다.

그때였다. 굳게 닫혀 있던 중환자실 안쪽에서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기계음이 연달아 울리기 시작했다.

"삐- 삐- 삐- 삐-!"

적막을 무참히 깨고 울리는 비상벨 소리. 당직 의사와 간호사들이 뛰어가며 다급하게 무언가를 지시하는 소리가 두꺼운 문틈 사이로 새어 나왔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brunch membership
추억바라기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따뜻한 일상과 행복한 생각을 온라인카지노에 담고 있어요. 주로 위로와 공감되는 에세이를 쓰며, 좋아하는 소설바카라을 읽으며, 직접 소설을 쓰고 있어요.

2,614 구독자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

  • 최근 30일간 2개의 멤버십 콘텐츠 발행
  • 총 32개의 혜택 콘텐츠
최신 발행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