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청객의 난입
창문을 열면 어느덧 서늘하고 건조한 11월의 늦가을 바람이 거실을 가로지르는 계절이었다. 담양 여행 이후 기적처럼 변화된 도윤의 일상은 한 번의 계절이 바뀌고 반년이 다 되어 가는 동안 이제는 두 사람의 삶 속에 아주 견고하고 당연한 평화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퇴근길마다 도윤의 창백한 안색을 살피며 가슴을 졸이던 해수의 얼굴에는 어느새 여유가 돌아와 있었고, 생명력이 시들시들 꺼져가는 원인 모를 무력감에 시달리던 도윤 역시 예전의 활기찬 30대의 모습을 되찾았은 듯 보였다. 오히려 그 지독한 대가를 이겨내서인지, 요즘 도윤의 체력은 20대 시절보다도 팔팔하고, 에너지가 넘쳐 보였다.
토요일 오후 2시. 따사로운 가을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거실은 그야말로 평화로움 그 자체였다. 거실 테이블 위에는 도윤이 방금 내려 향긋한 냄새를 풍기는 핸드드립 커피 두 잔이 놓여 있었고, TV에서는 유튜브 음악 채널을 통해 들리는 감미로운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소파에 길게 누운 해수는 도윤의 튼튼한 허벅지를 베개 삼아 베고 새로 산 에세이 바카라을 읽고 있었다. 도윤은 태블릿으로 밀린 경제 기사를 넘겨보며 간간히 해수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있었다.
"아, 좋다. 이런 게 찐 행복이지. 근데 우리 모처럼 주말인데 너무 아무것도 안 하고 늘어져 있는 거 아니야?" 해수가 바카라을 덮어 가슴 위에 올려두며 나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왜, 우리 윤 팀장님 몸 좀 찌뿌둥해? 심심하면 지금이라도 옷 갈아입고 나가서 영화라도 한 편 보고 올까?" 도윤이 태블릿에서 눈을 떼며 다정하게 묻자, 해수는 금세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도윤의 허벅지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아니, 막상 나가려니 귀찮아. 씻어야 하잖아. 잠깐 고민해 봤는데 역시 그냥 이렇게 뒹굴거리는 게 최고지. 내 완벽한 주말의 평온함을 그 어떤 것도 방해할 수 없어."
해수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으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딩동딩동딩동! 쾅쾅쾅! 딩동!'
기분 좋은 평온함을 유지하던 주말을 '와장창' 깨며, 누군가 현관문을 요란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쉴 새 없이 딩동거리는 초인종 소리에 놀란 해수가 펄쩍 뛰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뭐, 뭐야? 불이라도 났어? 도대체 누군데 문 부수라 두드리는 거야." 해수가 잔뜩 미간을 찌푸린 채 현관 인터폰 화면을 확인했다. 그리고 이내 화면 속에 비친 인물의 얼굴을 확인한 그녀의 입에서 깊은 탄식과 함께 험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아오, 진짜! 쟤가 왜 저래. 죽고 잡냐!"
도윤은 해수의 반응에 놀라 누군데 저렇게 말할까 하는 생각에 의아한 표정으로 해수가 앞장선 현관으로 다가갔다. 해수가 거칠게 도어록을 열어젖히자, 문 밖에는 그야말로 난민이 따로 없는 꼴을 한 20대 건장한 청년 한 명이 서 있었다. 청년의 양손에는 터질 듯이 빵빵한 대형 가방 한 개와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최고급 게이밍 PC 본체를 겨드랑이 사이에 위태롭게 끼워 넣고, 손으로는 게임전용 키보드를 든 채 서 있었다. 바로 해수의 세 살 터울 남동생이자, 도윤의 처남인 '윤해성'이었다.
"누나아아-! 매형어어엉-! 나 좀 살려줘어!"
현관문이 열리자마자 해성은 짐가방과 아슬아슬하게 끼고 있던 PC를 거실 바닥에 내려놓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엉엉 우는 시늉을 했다. 짝짝이로 신은 양말과 한껏 헝클어진 까치집 머리가 그의 다급했던 상황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야, 윤해성! 너 꼴이 이게 뭐야? 너 짐 다 싸 들고 우리 집엔 왜 온 거야? 설마 빚보증이라도 잘못 섰어?"
해수가 등짝을 때릴 기세로 윽박지르자, 해성은 억울하다는 듯 고개를 빳빳이 들며 소리쳤다.
"윤해수!!! 넌 맨날 내가 사고만 치고 사는 줄 아냐! 보증은 무슨! 우리 원룸 건물 배관이 터졌어! 하필 내 방 바로 위쪽 보일러 배관이 터져서 천장에서 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고! 지금 내 방 완전 워터파크야, 워터파크! 벽지 다 뜯고 공사 새로 해야 한대서 쫓겨났단 말이야!"
해성의 말에 해수는 기가 차다는 듯 이마를 짚었고, 상황을 파악한 도윤은 픽 웃음을 터뜨리며 바닥에 나뒹구는 해성의 짐가방들을 챙겨 들었다.
"아이고, 처남. 고생 많았겠네. 일단 빨리 들어와. 밥은 먹었어?"
도윤의 다정한 말에 해성은 그제야 안도하며 벌떡 일어나 도윤을 부여잡고 안았다.
"역시 우리 매형밖에 없어! 누나는 친동생이 길바닥에 나앉게 생겼는데 앞뒤 사정 따져보지도 않고 욕부터 하고 말이야. 어이구, 핏줄보다 매형이 낫다! 우리 누나 성질 받아주며 사는 것만 봐도 정말 의인이셔."
"이게 진짜 주둥이를 한 대 맞으려고. 공사하는데 며칠이나 걸린대? 당장 내일이라도 찜질방으로 꺼져."
투덜거리는 해수를 뒤로하고 도윤은 해성을 거실로 이끌었다. 해성은 그제야 숨을 돌리며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시원한 물을 꺼내다 주는 도윤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두 눈을 둥그렇게 떴다.
"어? 매형, 얼굴 되게 좋아졌다? 올봄에 누나랑 통화할 때 매형 얼굴 봤을 때는 완전 피골이 상접까진 아니더라도 바싹 말라서 당장 쓰러질 것 같았는데. 그때 나 매형 무슨 큰 병 걸린 줄 알고 뒤에서 몰래 울 뻔했잖아."
"하하-, 그랬어? 아마 그때는 회사 프로젝트 때문에 스트레스받아서 살이 좀 빠졌을 때 같은데, 지금은 아주 쌩쌩해. 누나 업고도 날아다닐 정도야."
도윤이 너스레를 떨자, 평소 헬스와 크로스핏에 미쳐 사는 근육질의 해성은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저었다.
"에이, 쌩쌩하긴 뭘 쌩쌩해. 매형 나이 앞자리가 삼십 댄데. 뼈 다쳐요. 조심해야 될 나이잖아요. 무거운 거 들거나 힘쓰는 일 있으면 무조건 이 제게 맡겨요. 알았죠? 며칠 신세 지는 동안 매형 힘쓸 일 없게 해 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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