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해서 더 눈부신
담양에서의 1박 2일 여행 이후, 도윤의 시간은 마치 고장 난 시계의 초침이 제자리를 찾은 것처럼 고요하고, 평온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하루이틀이면 신기루처럼 흩어질 줄 알았던 평온은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지독했던 무더위가 한풀 꺾이는 계절까지 흔들림 없이 이어졌다.
창문을 열면 제법 선선한 가을바람이 밀려들어 오는 10월. 그 기나긴 시간 동안 퇴근 무렵이면 어김없이 찾아와 전신을 짓누르던 서늘한 압박도, 심장이 덜컹거리며 엇박자로 뛰던 끔찍한 통증도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췄다.
맹렬하게 타오르며 몸을 갉아먹던 운명의 불길이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숨을 죽였다. 생기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던 도윤의 안색에는 어느새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혈색이 감돌고 있었다. 잔인한 시간 역행의 대가가 완전히 멈춰 섰다고 믿어버리고 싶을 만큼, 길지만 불안한 유예 기간이었다.
"음..."
나른한 일요일 아침. 얇은 이불 사이로 스며드는 따스한 가을 햇살에 도윤이 천천히 눈을 떴다. 예전 같았다면 밤새 뻣뻣하게 굳어버린 관절을 억지로 풀어내며 무거운 신음을 삼켰겠지만, 최근 아침의 몸은 오래된 족쇄가 풀린 듯 홀가분했다.
눈을 뜨자마자 습관적으로 가슴에 손을 얹었다. 손바닥 너머로 전해지는 심장 박동은 적당한 속도로 뛰고 있는 게 느껴졌다. 도윤은 그제야 길게 안도의 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제 품에 파고들어 새근새근 숨을 내쉬고 있는 해수의 둥근 이마가 눈에 들어왔다.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가는 어깨, 부드럽게 감긴 두 눈,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따뜻한 숨결이 도윤을 살며시 미소 짓게 했다. 도윤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해수의 흐트러진 앞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었다. 손끝에 닿는 그녀의 온기가 오늘따라 더 따뜻했다.
'다행이다. 오늘도 온전한 모습으로 네 옆에서 일어날 수 있어서.'
도윤은 해수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바닥을 딛고 서는 두 다리에 단단한 힘이 실렸다. 살아있다는, 그리고 평범하게 하루를 맞이할 수 있다는 감각. 그 당연했던 일상의 감각이 새삼스레 가슴을 뛰게 했다. 입가에는 평소 도윤에게 어울릴 듯한 여유롭고 부드러운 미소가 번져 있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주방에 들어선 도윤은 냉장고 문을 열고 식재료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지난 몇 달간 퇴근길마다 양손 무겁게 보양식을 사 오고, 쓰디쓴 약을 달여 먹이며 동동거리던 해수에게 오늘은 제대로 된 밥상을 차려주고 싶었다. 매일 아침 자신의 창백한 안색을 살피며 애태우던 아내에게, 이제는 정말 괜찮아졌다는 안도감과 함께 정성 가득한 따뜻한 밥 한 끼를 차려주고 싶었다.
볼에 물을 받아 건미역을 넉넉히 불리고, 도마 위에 소고기를 올려 능숙한 솜씨로 핏물을 뺐다. 칼날이 도마 위를 경쾌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일요일 아침의 고요한 적막을 기분 좋게 깼다. 달궈진 냄비에 고소한 참기름을 넉넉히 두르고 붉은 소고기를 달달 볶자, 주방 가득 허기를 자극하는 깊은 냄새가 퍼져나갔다. 이내 잘 불린 미역을 볶다가 뽀얀 육수를 부어 한소끔 푹 끓여내니, 속을 편안하게 달래줄 구수하고, 담백한 '도윤표 소고기 미역국'이 완성되어 갔다.
예전부터 위장이 약해 조금만 신경을 써도 속이 쓰리다며 밥을 잘 넘기지 못하던 해수를 위해, 부드럽고 몽글몽글하게 부풀어 오르는 뚝배기 폭탄 계란찜도 빼놓지 않고 불 위에 올렸다. 노란 계란물이 뚝배기 안에서 끓으며 익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도윤의 두 눈에는 포근한 온기가 스며들었다. 아픈 몸을 숨기며 두통약을 삼키던 지난봄의 지옥 같았던 아침들을 떠올려 보면, 주방에 서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요리를 할 수 있는 지금 이 순간은 그야말로 기적과도 같았다.
"어음... 뭐야, 이 구수한 냄새는..."
얼마 지나지 않아, 부스스한 머리를 한 해수가 눈을 비비며 방 밖으로 걸어 나왔다. 커다란 남편의 셔츠를 잠옷 대신 걸친 해수는, 주방에서 베이지색 앞치마를 두르고 간을 보고 있는 도윤을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칫했다.
"어? 서도윤? 아침부터 웬일이야? 어제 늦게 잤으면서 왜 벌써 일어나서 주방에 있어."
"윤 팀장님이 넉 달 내내 지극정성으로 보필해 주신 덕분에 요즘 내가 아주 쌩쌩해졌잖아. 얼른 세수하고 나와. 밥 먹자."
도윤이 부드럽게 웃으며 김이 모락모락 나는 뚝배기를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해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잰걸음으로 다가와 도윤의 안색을 꼼꼼히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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