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번째 이야기

멈춰 선 시간

by추억바라기

"이건... 안 돼, 해수야."

도윤의 갈라진 목소리가 서재의 고요한 공기를 무겁게 가르며 울려 퍼졌다. 해수의 얇은 손목을 잡은 도윤의 커다란 손에는 식은땀이 배어 있었지만, 그 힘만큼은 결코 밀려나지 않겠다는 듯 완강했다. 허공에서 마주한 두 사람의 시선 사이로 숨 막히는 긴장감이 흘렀다. 도윤의 짙은 눈동자를 올려다보는 해수의 커다란 눈망울이 당혹감과 서운함으로 흔들렸다.

"도윤아...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있지? 뭘 숨기고 있는 거야?"

해수의 물음에 도윤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퇴근 후 극심한 피로와 무력감으로 기절하듯 쓰러졌던 터라 온몸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지금 당장이라도 모든 진실을 털어놓고 그녀의 따뜻한 품에 안겨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고 싶은 충동이 목 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내가 널 살리기 위해 내 시간을 태우고 있다고, 사실은 온몸이 녹아내릴 것처럼 아프고 두렵다고.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이 겪는 이 시간 역행의 대가를 해수가 알게 되는 순간, 그녀는 평생을 죄바카라감 속에서 허덕일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이제야 겨우 되찾은 그녀의 맑은 일상에 자신의 희생이라는 그늘을 드리울 수는 없었다.

도윤은 천천히, 하지만 단호하게 해수의 손을 밀어내고 낡은 가죽 일기장을 덮었다. 그리고 굳어 있던 안면 근육을 풀며,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뗐다.

"숨기긴 뭘 숨겨... 그냥, 좀 창피해서 그래. 그리고 아무리 부부라도 그렇지, 허락도 없이 남의 일기장을 훔쳐보려고 하냐? 아무리 윤해수라도 그건 좀..."

"창피하다고? 뭘 숨기고 있는 건 아니고? 아까 잠꼬대하면서도 엄청 앓는 소리 내던데, 내가 오죽하면 일기장을 보려고 했겠어. 진짜 많이 아픈 거 아닌가 걱정된다고. 병원서 나 몰래 따로 들은 얘기 있는 거지?"

"아니야, 그런 거 없어. 요즘 회사에서 새로 들어간 데이터 분석 프로젝트 때문에 스트레스를 좀 많이 받았거든. 위에서는 성내라고 쪼아대지, 밑에 후배들은 무섭게 치고 올라오지. 선임으로서 중압감이 너무 심해서... 솔직히 요즘 체력도 달리고 머리도 빠개질 것 같아서 혼자 끄적거리던 감정 쓰레기통 같은 일기장이야."

도윤은 능청스럽게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당신한테 매일 징징대는 못난 남편처럼 보이기 싫어서 몰래 쓴 건데, 그걸 딱 들키네. 당신이 요즘 맨날 내 건강 챙겨준다고 애쓰는데 앓는 소리나 쓰고 있는 거 보면 속상해할까 봐 안 보여 주는 거지. 아오-, 진짜 남편 가오 상하게."

그제야 긴장과 불안으로 한껏 힘이 들어가 있던 해수의 어깨가 아래로 내려갔다. 병원에서도 일시적인 호르몬 불균형과 스트레스성 만성 피로가 겹친 것 같다고 했으니, 도윤의 변명은 꽤 그럴싸하게 들렸다. 해수는 서운함이 가신 얼굴로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이내 콧방귀를 뀌며 도윤의 어깨를 찰싹 때렸다.

"뭐야, 서도윤. 나는 또 무슨 큰 병이라도 숨기는 줄 알고 심장 내려앉을 뻔했잖아! 바보야, 부부 사이에 좀 징징대면 어때서. 힘들면 나한테 투정도 부리고 짜증도 내. 예전에 나 아플 때 당신이 다 받아줬던 것처럼, 나도 당신 힘들 때 어깨정도는 내줄 수 있어. 감정 쓰레기통까지는 못해도 감정 식기세척기 정도는 해보지 뭐. 그러니 혼자 속 끓이면서 끙끙대지 말고 말을 해."

"알았어, 알았어. 윤 팀장님 앞에서는 무장해제할 테니까 이 흑역사 일기장은 당분간 못 본 척해 줘. 알았지?"

도윤의 부드러운 미소와 넉살에, 서재를 무겁게 짓누르던 서늘한 공기가 마법처럼 흩어졌다. 해수는 침실에서 가져온 담요를 도윤의 어깨에 단단히 둘러주며 혀를 쯧쯧 찼다.

"어휴, 진짜. 아주 체력이 저질이야. 서 선임님, 요즘 체력 달리는 건 내가 누구보다 잘 아니까, 이번 주말에 무조건 스케줄 비워놔. 당신 이대로 두면 정말 안 되겠어."

"응? 주말에 뭐 하려고? 또 무슨 이상한 보약 지으러 가? 나 어제 먹은 홍삼즙도 아직 트림할 때마다 위에서 냄새가 올라오는 것 같은데."

"비밀이야. 당분간은 그냥 내가 주면 주는 대로 먹고,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 내가 확실하게 기력 보충시켜 줄 테니까."

해수가 으름장을 놓으며 서재를 빠져나간 뒤, 홀로 남은 도윤은 그제야 참고 있던 숨을 길게 토해내며 의자로 무너져 내렸다.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손이 덜덜 떨려왔다. 하마터면 모든 것을 망칠 뻔했다. 도윤은 일기장을 서랍 가장 깊숙한 곳에 밀어 넣고 이중으로 단단히 자물쇠를 채웠다. 다시는 이런 빈틈을 보이지 않겠다고, 입술을 깨물며 독하게 다짐했다.


며칠 뒤, 주말 아침. 도윤은 해수의 손에 이끌려 이른 아침부터 커다란 배낭을 멘 채 서울역 플랫폼에 서 있었다. 해수가 도윤의 기분 전환과 체력 회복을 위해 준비한 비장의 카드는 바로 '1박 2일 기차 여행'이었다.

"우리 남편, 맨날 삭막한 사무실에서 컴퓨터 모니터만 보고 숫자만 들여다보니까 몸이 굳는 거야. 오늘은 초록색 풀 냄새 듬뿍 맡고, 맑은 공기 마시면서 걷기 좋은 곳으로 갈 거니까 그렇게 알아."

해수는 평소보다 훨씬 가벼운 옷차림으로 아이처럼 들뜬 얼굴을 한 채 도윤의 팔짱을 꼈다. 사실 도윤은 아침에 집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걱정이 앞섰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비상구 계단에서 생명을 쥐어 짜내는 끔찍한 일을 겪었기에, 무리한 외부 활동이 또 다른 페널티를 부추겨 해수 앞에서 쓰러지기라도 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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