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번째 이야기

드러나는 비밀

by추억바라기

"서도윤! 딴청 피우지 말고 얼른 마셔. 한 방울이라도 남기면 오늘 출근은 고사하고, 밖으로 한 발짝도 못 나갈 줄 알아."

월요일 아침. 평소라면 도윤이 해수의 예민했던 위장을 달래기 위해 이른 새벽부터 정성껏 끓여낸 맑은 뭇국이나 부드러운 채소죽 냄새가 따뜻하게 감돌았을 주방이었다. 하지만 오늘 아침 주방의 공기는 완전히 달랐다. 코끝을 알싸하게 찌르는, 진하고 묵직한 한약재 냄새가 집안 전체를 빈틈없이 꽉 채우고 있었다.

식탁 중앙에는 그 묵직한 향의 정체를 예상할 수 있는 검은빛의 액체가 담긴 머그잔이 놓여 있었다. 홍삼, 녹용 그리고 이름을 다 외우지도 못할 온갖 몸에 좋다는 약재들을 때려 넣고 달여낸 이른바 '해수표 특제 생명수'였다.

팔짱을 낀 채 식탁 맞은편에 선 해수는 매의 눈으로 도윤을 감시하고 있었다. 일주일 전, 병원을 다시 찾아가 '조기 노화'와 '원인 모를 급격한 생체 기능 저하'이라는 충격적인 최종 소견을 듣고 온 이후로, 도윤이 도맡아 오던 식단과 건강 관리의 주도권은 온전히 해수에게로 넘어와 있었다.

예전에는 도윤이 해수의 식단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무리한 야근을 막아섰다면, 이제는 해수가 도윤의 일거수일투족을 철통같이 관리했다. 그녀는 퇴근하자마자 인터넷을 뒤져 온갖 슈퍼푸드와 고농축 영양제를 결제했고, 주말이면 용하다는 한의원을 수소문해 비싼 보약을 지어 날랐다. 도윤의 서재 바카라상과 식탁 위는 어느새 형형색색의 비타민 통과 영양 즙 파우치들로 견고한 성벽처럼 둘러싸여 있었다.

"아우, 윤 팀장님. 나 이거 어제저녁에도 마셨잖아. 진짜 너무 써서 혀가 다 마비될 것 같아. 퇴근하고 저녁에 와서 먹으면 안 될까?"

"써야 약이지, 달면 약이겠어? 내 위장병 고친다고 매일같이 풀떼기만 먹이던 서도윤은 어디 가고 이제 와서 엄살이야? 내 속 타들어 가는 거 보기 싫으면 잔말 말고 얼른 마셔. 오늘 퇴근길에는 자연산 장어 즙도 알아볼 거니까 얌전히 주는 대로 다 받아먹어라. 알았냐?"

단호한 해수의 호통에 도윤은 결국 앓는 소리를 내며 두 눈을 질끈 감고 머그잔을 잡았다. 그는 머그잔을 들어 올려 숨을 참고 단숨에 들이켰다. 지독하게 쓰고 텁텁한 맛이 식도를 넘어갔지만, 도윤의 입가에는 도리어 다정한 미소가 번져 올랐다.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해수의 두 눈에 속상함과 애정이 얼마나 듬뿍 묻어 있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해수가 자신을 위해 챙겨준 것이라면, 이보다 더한 것도 기꺼이 웃으며 삼킬 수 있었다. 아침부터 자신을 위해 동동거리며 약을 챙기고 잔소리를 쏟아내는 이 소란스럽고도 따뜻한 풍경이야말로, 도윤이 제 수명을 덜어내서라도 끝끝내 지키고 싶었던 가장 완벽한 일상이었다.

'몸에 좋다는 이런 약들을 아무리 먹어도... 이미 깎여나간 수명과 시간들이 다시 채워지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네가 이렇게 곁에서 챙겨주니까, 오히려 욕심이 나네. 더 오래 함께 있었으면 하는.'

도윤은 빈 잔을 식탁 위에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출근 채비를 마친 그는 해수의 어깨를 가볍게 끌어안으며 그녀의 부드러운 뺨에 장난스럽게 입술을 맞췄다.

"잘 먹었습니다, 윤 팀장님. 우리 해수가 아침부터 정성을 쏟아부어 주니까 세포 하나하나까지 불끈불끈 힘이 솟는 것 같네. 나 돈 많이 벌어올게. 다녀오겠습니다."

도윤은 평소와 같이 씩씩하게 인사를 건네고 현관문을 나섰다. 하지만 현관문 너머로 걸음을 옮기는 순간 도윤의 꼿꼿했던 어깨는 무겁게 축 늘어졌다. 해수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급히 현관을 나서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방금 마신 한약의 기운이 무색하게도 여전히 핏기 없이 창백하고 파리했다. 밤새 식은땀을 흘리며 뒤척인 탓에 눈 밑은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고, 억지로 끌어올렸던 입꼬리는 미세하게 경련을 일으켰다.

회사에 도착한 도윤은 자리에 앉자마자 밀려드는 기획안과 방대한 데이터 분석 자료들에 파묻혔다. 모니터 화면의 불빛이 오늘따라 유난히 눈을 찌르듯 따갑게 느껴졌다.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고, 사무실 가득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만 건조하게 울려 퍼지던 오후 3시 무렵이었다.

'빠이이 잉—'

갑작스럽게 고막을 날카롭게 찢고 들어오는 기분 나쁜 이명 현상이 귓가를 강타했다. 평소 겪던 가벼운 울림과는 차원이 달랐다. 머릿속 한가운데를 날카로운 송곳으로 긁는 듯한 기분 나쁘고, 소름 끼치는 소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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