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가
"아, 진짜 서도윤! 나 진짜 배고파서 미쳐버릴 것 같다고! 딱 오늘 밤만 어떻게 안 되겠니! 요플레 하나만 먹자, 응? 플레인은 위에 좋대잖아!"
금요일 밤 11시 30분. 해수는 냉장고를 노려보며 협박도 했다가, 화도 내봤다가 그도 안되니 금방이라도 울 기세로 도윤에게 매달려서 애원까지 하고 있다. 도윤은 그 앞을 태산처럼 막아서며 단호하게 두 팔을 엑스자로 교차했다.
"윤해수 환자분! 내일 오전 9시가 종합검진 예약이 잡혀있습니다. 저녁 8시부터 완전 금식이라고 어제부터 백 번은 말씀드렸죠? 물도 안 되는데, 요플레가 웬 말이냐고요. 안 됩니다, 안 돼요. 절대!!! 네버!!!"
"아니, 종합검진은 다음에 하면 되잖아! 사람이 굶어 죽게 생겼는데 검사가 다 무슨 소용이야! 나 진짜 현기증 난단 말이야. 지금 내 배에서 천둥 치는 소리 안 들려, 응?"
"그러게 일찍 자라고 했잖아요. 현기증 나면 지금 바로 주무십시오. 수면이 최고의 보약입니다. 자면 배고픈 것도 몰라요."
도윤은 그렇게 냉장고 문을 열지 않았고, 징징거리는 해수를 번쩍 안아 들어 안방으로 옮겼다. 해수를 침대 위로 휙 던지고서는 발버둥 치며 억울해하는 해수의 볼과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춘 도윤이 해수를 보며 미소 지었다.
"내일 검사 무사히 다 끝나면, 우리 해수가 좋아하는 거 다 사줄게. 그러니까 오늘은 얌전히 자자. 우리 예쁜이." "치-... 두고 봐. 내일 검사 끝나자마자 소고기 오인분 시켜서 나 혼자 다 먹을 거야. 서방은 옆에서 고기나 구워. 알았지?"
투덜거리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해수는, 도윤이 등을 일정한 박자로 토닥여주자 이내 피곤했는지 새근새근 옅은 숨소리를 내며 잠이 들었다. 도윤은 곤히 잠든 그녀의 둥근 이마와 편안하게 풀린 미간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오늘도 고생했어. 해수야. 드디어 내일이네.'
해수를 살리기 위한 '생존 프로젝트'의 가장 중요하고도 떨리는 첫 번째 관문이었다. 그녀의 몸속에 혹시라도 숨어있을지 모를 불행의 씨앗을 샅샅이 찾아내 싹을 잘라버려야 할 그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도윤은 해수의 따뜻한 손을 고쳐 쥐며, 내일 듣게 될 결과가 아무 문제없는 건강하고 무탈한 상태이기를 마음으로 깊이 기도했다.
토요일 아침, 대학병원 건강검진 센터. 최신식 시설을 갖춘 센터 안은 이른 아침부터 검진복을 입고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손목에 찬 전자 팔찌를 태그 하며 채혈, 심전도, 초음파 등 기초 검사들을 하나씩 클리어한 해수는 마침내 가장 중요한 관문인 소화기 내시경 센터 앞 대기실 의자에 도윤과 나란히 앉았다.
품이 넉넉한 파스텔 톤의 검진복을 입은 해수는 간호사가 건네준 짜 먹는 하얀색 위장 가스 제거제를 억지로 삼키며 미간을 찌푸렸다. 금식의 허기와 속 쓰림은 어디 가고, 막상 차가운 병원 공기를 맡으며 내시경실 앞 대기석에 앉아있자 조금 겁이 나는 모양이었다. 해수는 긴장한 표정으로 옆에 앉은 도윤의 커다란 손을 제 양손으로 쥐고 꼼지락꼼지락 만지작거렸다.
"야, 서도윤. 나 갑자기 좀 무섭다. 인터넷 기사를 보다 보니까 수면 마취 안 깨는 사람도 있다던데 어떡해? 그리고 위내시경 하다가 내 배 속에 혹 같은 거, 막 몹쓸 병 같은 거 발견되면 어떡해? 엊그제 위궤양도 엄청 아프고 쓰렸단 말이야..."
도윤은 잡힌 손에 힘을 주어 차가워진 그녀의 손을 따뜻하고 단단하게 감싸 쥐었다.
"쓸데없는 소리 하고 있네. 넌 수면 마취 약 들어가면 1초 만에 코 골면서 딥슬립 할 위인이야. 걱정하지 말고 그냥 푹 자고 와. 내가 이 대기실 의자에서 1밀리미터도 안 움직이고 딱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잠시 후, 대기실 벽면에 걸린 모니터에 해수의 이름이 깜빡였고 간호사의 호출이 들려왔다.
"윤해수 님, 내시경실 안쪽으로 들어오실게요. 보호자분은 여기서 대기해 주시고요."
도윤의 손을 놓은 해수가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보호자 출입이 통제되는 자동문 너머로 쭈뼛쭈뼛 걸음을 옮겼다. 굳게 닫힌 불투명한 유리문 앞에서, 씩씩하게 웃으며 아내를 배웅했던 도윤의 얼굴에 서서히 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 그리고 차가운 공기가 코끝을 스치자 억눌러두었던 과거, 아니 미래의 끔찍했던 트라우마가 봇물 터지듯 밀려왔기 때문이다.
2026년 어느 늦은 밤. 하얗게 질린 입술로 고통에 몸부림치며 응급실 침대에 실려 가던 해수의 앙상한 모습. 각종 수치와 알 수 없는 의학 용어들이 적힌 차트를 들고, 전이가 너무 광범위하게 진행되어 수술조차 불가능하다며 길어야 3개월이라는 잔인한 선고를 내리던 의사의 무미건조한 목소리. 그리고 차가운 종양내과 병실 유리창 너머로 온갖 기계에 둘러싸인 채, 초 단위로 생명의 불씨가 꺼져가던 나의 하나뿐인 우주.
도윤은 검사실 밖 대기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꽉 감싸 쥐었다. 바닥을 향해 숙인 고개 아래로 뚝, 뚝 눈물이 쉴 새 없이 떨어져 내렸다. 누구에게 들킬까 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도윤은 조용히 어깨만을 들썩이며 눈물을 삼켰다.
'제발... 제발 이번엔 아무 일도 없게 해 주세요. 제 모든 시간을 다 가져가셔도 좋으니, 제발 우리 해수 몸에는 어떤 흠집도 남기지 말아 주세요. 아직 늦지 않았기를, 제발요...'
삼십 분이 남짓 지났을까. "윤해수 님 보호자 분" 하고 부르는 소리에 도윤이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회복실에서 깬 해수가 비몽사몽 한 얼굴로 간호사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 나오고 있었다. 눈가가 붉게 짓무른 도윤이 성큼성큼 다가가 그녀를 제 품으로 단단히 부축했다.
"어으... 서도윤... 나 침 흘렸나 봐. 입 옆에 침자국 묻었지?"
"어, 엄청 많이 흘렸나 봐. 턱받이 하고 올 걸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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