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이야기

시간 청구서

by추억바라기

"건배! 우리 윤해수 대리님의 번뜩이는 기획력과, 기가 막힌 타이밍에 막힌 속을 한 방에 뚫어준 내조의 왕 서도윤을 위하여!"

금요일 저녁, 평소에는 쉽게 먹지도 못하는 비싼 프리미엄 한우가 불판 위에서 지글지글 경쾌한 소리를 내며 익어가고 있었다. 기분 좋게 부딪혀 온 해수의 소주잔에는 도윤의 만류로 맹물이 채워져 있었지만, 텐션만큼은 이미 만취 상태를 뛰어넘고 있었다.

도윤이 무심코 던져주었던 카피가 김 부장의 깐깐한 결재선을 프리패스로 통과한 것은 물론, 광고주 미팅에서도 만족스러운 결과를 이끌어냈다. 그 덕분에 해수는 금요일 야근의 늪에서 벗어나 양손 무겁게 최고급 투뿔 한우를 사 들고 위풍당당하게 조기 퇴근을 감행할 수 있었다.

"아-, 진짜 아까워. 네가 우리 부장이 내게 감탄과 경외의 눈빛을 보내는 걸 봤어야 했는데. 김 부장이 나보고 당장 다음 주부터 TF팀 단독 리더 맡으라고 난리도 아니었어. 야, 서도윤! 진짜 고마워! 너 오늘 고기 배 터지게 먹어라! 오늘은 내가 다 양보할게."

신이 난 해수가 잘 익은 살치살 한 점을 집어 도윤의 입 앞으로 불쑥 내밀었다. 도윤은 날아오는 고기를 다시 낚아채 상추와 깻잎을 각각 겹치고, 그 위에 푹 쪄낸 양배추와 구운 마늘까지 야무지게 올려 커다란 쌈을 제조했다.

"자, 우리 윤 대리님. 고기만 먹지 말고 이렇게 채소를 드셔야죠. 위궤양 약 먹는 환자가 기름진 투뿔 한우가 웬 말입니까. 자, 아~ 해."

"이-잉, 산통 깨지게 정말 이러기야? 한우의 우아한 육즙을 야채 따위로 덮어버리다니, 넌 한우에 대한 예의가 없어!"

입을 삐죽이면서도 해수는 도윤이 내민 커다란 쌈을 입이 터져라 받아먹었다. 볼이 빵빵해진 채 오물거리는 해수의 입가에 묻은 쌈장을 닦아주며, 도윤은 그제야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그래, 잘 먹고, 스트레스받지 말고, 이렇게 웃으면서 지내면 돼. 그러면 해수의 건강에도 아무 일이 안 생길 거야.'

하지만 도윤의 평온은 주말 아침이 밝자마자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났다. 토요일 아침 9시, 안방에서 통화하는 해수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거실까지 들려왔다.

"어, 엄마! 나 이제 일어났지. 뭐? 해성이가 또 사고를 쳤다고? 아니, 걔는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그런 말도 안 되는 사기를 당해! 하아… 알았어. 엄마 울지 말고 가만히 계셔요. 일단 도윤이 깨워서 지금 바로 넘어갈게. 어, 등갈비찜 했다고? 알았어, 서둘러서 넘어갈게."

통화를 끊고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는 해수를 보며, 소파에 앉아있던 도윤의 머릿속에 위험을 알리는 경고등이 울리기 시작했다.

해수에게는 세 살 터울 남동생이 있었다. 이름은 윤해성이었고, 5년 전 해성이 20대 초반일 때 친구와 동업을 한답시고 무리하게 대출을 받았다가 크게 사기를 당해 빚더미에 앉았었다. 'K-장녀'의 바카라임감이 뼛속까지 박혀 있던 해수는 도윤에게조차 짐을 지우기 싫어 결혼 후에도 그 사실을 숨겼고, 지난 몇 년간 혼자 마이너스 대출을 받아 빚을 수습해 왔었다. 그런데 이번에 또 남은 빚을 한 번에 만회하겠다며 어설픈 투자 사기에 휘말려 일이 터진 것이다.

과거의 도윤은 이맘때쯤 해수가 겪었던 그 극심한 속앓이를 전혀 몰랐다. 가족의 빚이라는 무거운 짐, 그리고 친정에 갈 때마다 쏟아지는 장모님의 눈물 섞인 하소연. 그 끔찍한 감정 쓰레기통 역할을 자처했던 시간들이 해수의 연약한 마음을 얼마나 까맣게 태워버렸는지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그저 장모님이 차려주는 매운 음식과 소주를 넙죽넙죽 받아먹으며 거실에서 장인어른과 TV나 보던 철없는 사위였으니까.

하지만 이번엔 달라야 했다. 장모님의 맛나지만 자극적인 맵고, 짠 요리도, 처남이 사고 친 저 끔찍한 빚더미 스트레스도 해수에게서 완벽하게 차단해야 했다.

'내 사랑하는 아내의 속을 갉아먹는 건 그게 가족이라도 두고 볼 수는 없어.'

비장한 각오로 처갓집 현관을 들어선 도윤의 두 주먹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아이고, 우리 딸 왔어? 서 서방도 왔는가! 얼른 들어와, 등갈비찜 방금 막 졸여서 아주 매콤하고 야들야들해!"

도어록을 열자마자 코끝으로 전해오는 진한 갈비 냄새와 매콤한 고춧가루 냄새가 코와 눈을 자극했다. 식탁 위에는 새빨갛다 못해 검붉은 빛이 도는 등갈비찜과 갓 버무린 파김치가 푸짐하게 차려져 있었다. 극심한 스트레스 상황에서 해수가 가장 먼저 찾는 것이 바로 저 위 점막을 무자비하게 폭격할 장모님의 매운 음식이었다.

"와-, 냄새 미쳤네! 엄마! 나 배고파 죽는 줄 알았어!"

집에 도착 전까지 잔뜩 화가 난 해수의 표정은 온데간데없었고, 혀를 자극하는 매운 향에 이끌려 해수는 습관처럼 젓가락을 들고 식탁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이를 그냥 두고 볼 도윤이 아니었다. 도윤은 번개 같은 속도로 해수의 뒷덜미를 낚아채어 거실 소파 쪽으로 휙 돌려세웠다.

"어어? 서도윤, 너 뭐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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