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이야기

완벽한 스포일러

by추억바라기

구수한 소고기 뭇국 냄새가 따뜻한 온기만큼 주방을 가득 채웠다. 해수와 식탁을 마주 보고 앉은 도윤의 숟가락에는 방금 끓인 소고기 뭇국이 맛있는 김을 모락모락 피우고 있었다. 도윤은 국물이 가득 담긴 수저를 입으로 가져갔다. 혀끝에 닿는 적당하게 맛있는 짠맛과 푹 익은 무에서 우러나온 달큰한 맛이 꿈이 아님을 더욱 실감케 했다. 도윤은 지금 해수와 마주 앉아있는 이 순간이 너무도 반갑고, 신기해 다시 눈가가 촉촉해졌다. 해수에게는 이런 도윤의 모습이 조금은 어색하게 비쳤다.

"서도윤! 내가 끓여준 국이 그렇게 감동적이야? 하긴 내가 생각해도 오늘은 아주 음식이 아니라 작품이다 작품. 국물이 정말 끝내줘요. 그만 뚝- 아무리 그렇게 나와도 나 똑같이는 또 못 끓여줘. 알지?"

자화자찬을 늘어놓으며 오물오물 밥을 씹어 넘기는 해수의 볼록한 뺨, 숟가락을 야무지게 쥔 희고 통통한 손가락,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윤기 나는 갈색 머릿결이 도윤에게는 모두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병실에 누워 독한 항암 치료의 부작용으로 물 한 모금조차 제대로 넘기지 못하며 힘들어했던 그녀였다. 그런 해수가 지금 눈앞에서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워내고 있다는 사실이 도윤은 그저 경이롭고 벅찰 뿐이었다.

"너 왜 그래? 밥 안 먹고. 얼굴에 구멍 뚫어지겠다.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아님 아침부터 내가 너무 예뻐서 넋이 나갔냐?"

해수가 숟가락을 입에 문 채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거렸다. 평소 같았으면 '어, 눈곱 묻었어. 세수나 해라.' 하고 장난스럽게 받아쳤겠지만, 도윤은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뭇국을 크게 떠서 입에 밀어 넣었다. 뜨거운 국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감각, 뱃속이 든든하게 채워지는 이 평범한 포만감조차 도윤에게는 신이 내린 축복 같았다.

"아, 아니. 국이 너무 맛있어서 그랬어. 진짜로. 미슐랭 쓰리스타 셰프가 와서 무릎 꿇고 비법 전수해 달라고 빌 맛이야. 우리 해수 대단하네."

"우잉? 서도윤, 아침부터 왜 이러는 거지? 너 나한테 뭐 잘못한 거 있어? 몰래 비상금 털어서 주식이라도 샀냐? 캬캬-."

해수가 깔깔대며 웃는 소리가 도윤의 귀에는 세상 어떤 음악보다 경쾌한 음악 소리처럼 울려 퍼졌다. 이 꿈같은 현실이 어느 순간 신기루처럼 깨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마음 한구석을 불안하게 만들었지만, 벅차오르는 기쁨이 그 불안을 아득히 덮어버렸다.

'진짜 돌아왔어. 2017년으로. 아무 데도 아프지 않은 건강한 해수가 내 눈앞에 이렇게 버젓이 있어.'

아침 식사를 마치고 출근 준비를 하는 내내, 도윤의 시선은 해수의 동선에 찰거머리처럼 한 시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들러붙어 있었다. 화장대 앞에서 입술에 립스틱을 덧바르는 입술, 거울을 보며 앞머리에 볼륨을 넣는 손길, 검은색 슬랙스에 블라우스를 챙겨 입는 분주한 움직임. 그 모든 생동감 넘치는 일상의 조각들이 도윤에게는 가슴이 벅차오르는 순간의 연속이었다.

"나 먼저 나갈게! 오늘 저녁에 팀 회식 있어서 늦을지도 몰라. 퇴근하면 먼저 밥 챙겨 먹고 있어!"

"잠깐, 해수야!"

하이힐에 발을 욱여넣고 현관문을 열고 나가려던 해수를, 도윤이 다급하게 불러 세웠다. 해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돌아보자, 도윤은 성큼성큼 다가가 현관문을 닫고는 그녀의 어깨를 양손으로 잡다.

"오늘 회식, 안 가면 안 돼? 아니, 그냥 가지 마."

"응? 무슨 소리야. 이번에 우리 팀에서 맡은 코스메틱 브랜드 론칭 기획안 무사히 1차 통과돼서 김 부장님이 법인카드 쏘시는 날인데. 이번 프로젝트 내가 메인이잖아. 내가 빠지면 분위기 완전 초상집 돼."

"그래도… 꼭 가야 해? 네가 안 가면 김 부장이 막 시말서 쓰라고 닦달해?"

"아침부터 서도윤 씨 왜 이렇게 칭얼거리지. 서도윤. 혹시 내가 혼자 맛난 고기 먹는다고 그러는 거야? 알았어, 알았어. 이번 주말에 내가 삼겹살 쏠 테니까 삐치지 마라."

해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도윤의 볼을 꼬집었다. 평소의 도윤이라면 '오, 윤해수 능력자! 김 부장 법카 한도 끝까지 털어서 뽕을 뽑고 와라!'라며 장난스럽게 등을 두드려주었을 것이다. 열여덟 살에 만나 10년을 친구로 지내고 부부가 된 이후에도 늘 장난기 넘치던 남편이, 이렇게 진지하고 절박한 눈빛으로 회식을 말리며 현관문을 가로막고 서 있는 모습은 해수로서도 당황스럽고, 낯설었다.

"해수야, 진짜 가야 한다면… 술 절대 많이 마시지 마. 소주잔에 몰래 물 채워서 마시는 척만 해. 그리고 고기 탄 거 절대 먹지 말고, 맵고 짠 찌개 같은 건 입에도 대지 말고. 알았지?"

도윤의 따발총 같은 잔소리에 해수는 기가 차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뭐야, 래퍼라도 된 줄. 와- 읊어내는 라임보소! 갑자기 어머니 빙의라도 했어? 알았어. 적당히 마시고 일찍 들어올게. 우리 서방이 오늘따라 왜 이렇게 과잉보호 모드일까?"

해수는 도윤의 뺨에 살짝 입을 맞추고는 닫힌 현관문을 다시 열고 경쾌한 발걸음으로 나섰다.

"돈 많이 벌어올게. 이따 퇴근하고 봐, 서방!"

도윤은 손을 흔드는 그녀를 차마 더 붙잡지 못하고, 닫힌 문을 한 참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제야 기억이 났다. 10년 전 이맘때쯤, 해수는 다니던 광고 대행사에서 비중 있는 프로젝트를 맡았었다. 일에 있어서만큼은 지독한 완벽주의자였던 그녀는 몇 달을 야근으로 고생하며 기획안에 매달렸고, 밥 먹는 시간조차 아깝다며 텅 빈 위장에 독한 투샷, 쓰리샷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미친 듯이 들이부었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혀가 마비될 정도로 매운 엽기 떡볶이나 캅사이신이 듬뿍 들어간 불닭을 찾았고, 잦은 야근 후 이어지는 회식 자리에서는 주는 대로 폭탄주를 받아 마셨다.

당시의 도윤은 그저 그녀의 열정과 성공을 칭찬하고 응원하기만 했다. 그녀가 습관처럼 소화제를 입에 털어 넣으며 배를 부여잡았을 때도, 그저 신경성 위염이나 가벼운 체증이려니 대수롭지 않게 넘겼었다.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그 가벼운 말 한마디가 전부였던 자신의 무심하고 안일했던 방관이, 훗날 췌장암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끔찍한 병마로 돌아왔던 것이다.

'안 돼.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 순 없어. 그깟 프로젝트, 김 부장의 법인 카드가 대수야?'

출근 후 바카라상에 앉아 있는 내내, 도윤의 머릿속은 오직 해수를 살려야 한다는 절박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모니터의 텍스트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온종일 그녀의 식습관을 고치고 10년 뒤의 비극을 막아낼 방법만 치열하게 고민했다.

퇴근 시간이 되자마자 쏜살같이 집으로 돌아온 도윤은, 옷을 갈아입을 새도 없이 서재 바카라상 앞에 앉았다. 그는 바카라상 서랍 깊숙한 곳에서 두툼한 가죽 일기장을 조심스럽게 꺼내 펼쳤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녀가 아파할 때 피눈물을 쏟으며 간절한 기도를 써 내려갔던 그 일기장이었다.

이번 생의 일기장은 그녀의 죽음을 향해 가는 슬픈 카운트다운이나 낭만적인 관찰 일기가 되어서는 안 됐다. 이것은 철저하게 그녀를 살리기 위한 생존 지침서, 잔인한 운명에 맞서는 '라이프 노트'가 되어야 했다. 도윤은 펜을 꽉 쥐고, 하루 종일 머릿속으로 수백 번 시뮬레이션했던 생존의 조각들을 미친 듯이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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