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
나는 대화할 때 비교적 인내심이 있는 사람이다.
적어도 처음 3분은 그렇다.
누군가 이야기를 시작하면 고개를 끄덕인다.
적당한 순간에 “응”, “그래?”, “아, 그랬구나”도 넣는다.
슬롯생활을 오래 한 사람답게 추임새의 종류와 타이밍도 제법 갖추고 있다.
문제는 이야기가 3분을 넘어가면서도 도대체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을 때다.
가령 내가 묻는다.
“그래서 병원에는 갔어?”
간단한 질문이다.
갔다.
안 갔다.
둘 중 하나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런데 상대는 말한다.
“그게 말이야. 내가 원래 화요일에 가려고 했거든?
그런데 화요일에 언니가 온다는 거야. 언니 알지? 지난번에 내가 말했던…….”
나는 아직 괜찮다.
언니가 병원 방문 여부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을 수도 있다.
듣는다.
그런데 언니에게는 딸이 있고, 그 딸이 요즘 회사를 옮길까 고민 중이며, 새로 들어온 팀장이 성격이
조금 이상하고, 그 팀장이 예전에 살았던 동네가 공교롭게도 상대가 신혼 때 살던 동네다.
어느 순간 나는 병원을 잃어버린다.
병원은 어디로 갔는가.
내가 분명 병원에 갔느냐고 물었던 것 같은데 우리는 지금 왜 언니 딸 회사의 팀장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내 머릿속에서 조용히 구조 작업이 시작된다.
병원을 찾습니다....................................................../.............??......,,,,,
조금 더 기다린다.
혹시 이 모든 이야기가 놀라운 복선일 수도 있다.
언니의 딸과 이상한 팀장과 신혼집 동네를 거쳐 마지막에 병원으로 장엄하게 회귀하는 대서사가
준비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병원은 돌아오지 않는다.
내 미간이 좁아진다.
이쯤 되면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아니라 실종된 주제를 찾고 있다.
그리고 결국 참지 못한다.
“그래서 병원은 갔어, 안 갔어?”
상대는 약간 서운한 표정을 짓는다.
“아니, 상황을 설명해야 네가 이해를 하지.”
아.
그랬구나.
나는 지금까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서 병원에 갔는지를 몰랐던 것이구나.
내가 성급했다.!??,,,,,,
언니의 방문과 조카의 이직과 팀장의 성격과 신혼집 동네를 모두 이해한 뒤에야 한 인간의 병원 방문
여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나는 잠시 반성한다.
약 4초 정도.
그리고 다시 묻는다.
“그래서 갔어?”
나는 이런 식의 대화에 유독 약하다.
긴 이야기가 싫은 것은 아니다. 이야기가 재미있으면 밤새 들어도 된다. 맥락이 필요하다는 말에도 동의한다.
하지만 나는 맥락과 장광설 사이에는 국경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상황 설명은 결론을 이해하게 해 준다.
장광설은 결론을 잊게 해 준다.
둘은 다르다.
더 괴로운 경우는 질문과 답이 서로 다른 길을 갈 때다.
나는 A를 물었다.
상대는 B를 말한다.
B를 설명하다 C가 등장한다.
C에는 사연이 있어서 D를 알아야 한다.
D를 이해하려면 2017년으로 돌아가야 한다.
나는 2026년에 질문 하나 했다가 졸지에 시간여행을 한다.
그동안 A는 쓸쓸하게 버려져 있다.
그래서 나는 가끔 대화 중에 아주 직접적인 말을 한다.
“그래서 요점이 뭔데?”
이 말은 대체로 인기가 없다.
듣는 사람의 표정을 보면 안다.
아마 속으로 생각할 것이다.
인간이 왜 이렇게 여유가 없어.!!!
맞다.
나도 인정한다.
나는 대화에서 결론 선납제를 선호한다.
일단 결론부터 내놓으시고 사정이 있으시면 뒤에 첨부해 주십시오.
“병원은 갔어. 그런데 가기까지 일이 좀 있었어.”
좋다.
이제 얼마든지 말하시라.
언니도 등장하시고 조카도 오시고 이상한 팀장도 나오시라. 신혼집 동네까지 가도 좋다.
나는 이미 병원이 무사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평온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상대만 답답한 것도 아니다.
나 역시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으면 꽤 질긴 인간이다.
“그러니까 정확히 무슨 뜻이야?”
설명을 듣는다.
“그건 알겠는데, 내가 묻는 건 그게 아니고.”
다시 듣는다.
“아니, 그러니까 내 질문은…….”
이쯤 되면 상대방도 나를 보며 생각할 것이다.
그냥 좀 알아들으면 안 되나.
안 된다.
나는 정확히 알아들어야 한다.
결국 우리는 서로에게 비슷한 고통을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상대는 나에게 필요 이상의 정보를 공급하고, 나는 상대에게 필요 이상의 정확성을 요구한다.
한쪽은 말이 너무 많고 한쪽은 요점에 너무 급하다.
한쪽은 “설명을 좀 들어봐” 하고, 다른 한쪽은 “결론부터 말해” 한다.
둘이 만나면 대화가 아니라 협상이다.
요즘은 그래서 장광설을 만났을 때 조금 기다려보려고 한다.
혹시 저 사람은 말하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내가 군더더기라고 생각한 문장이 그 사람에게는 꼭 필요한 징검다리일 수도 있다.
물론 그렇다고 무한정 기다리겠다는 뜻은 아니다.
나에게도 남은 생이 있다.
우회도로를 이용하는 것은 좋다.
경치도 보고 사연도 듣고 중간에 휴게소도 들를 수 있다.
다만 한 가지 부탁이 있다.
출발하기 전에 목적지만 좀 알려줬으면 좋겠다.
그래야 나도 웃으며 따라갈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병원에 갔는지 안 갔는지는 좀 먼저 말해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