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이 식는 시간

감정은 먼저 도착하고, 사유는 천천히 따라온다.

사유는 문장을 천천히 식힌다


글을 쓰다 보면 마음은 언제나 먼저 달아오른다. 어떤 날은 억울함이 먼저 달려오고, 어떤 날은 기쁨이 먼저 종이를 차지한다. 손끝은 그 감정을 놓칠세라 서둘러 문장을 적어 내려간다. 그렇게 쓰인 문장은 대개 빠르고 뜨겁다. 그러나 다음 날 다시 읽어 보면, 그 안에는 내가 있었을 뿐 독자가 들어설 자리는 없었다.


언젠가 메모장에 쏟아낸 글을 다시 읽은 적이 있다. 그날의 분노는 문장마다 남아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무엇 때문에 그토록 화가 났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감정은 선명했지만 장면은 사라져 있었다. 마치 소리만 크게 울릴 뿐 형체는 없는 메아리 같았다.


그 후로는 조금씩 기다리는 버릇을 들였다. 문장을 쓰기 전에 감정이 가라앉기를 기다리고, 한 번 쓴 글은 바로 내보내지 않고 며칠을 묵혔다. 시간이 지나면 신기하게도 처음에는 절대 지울 수 없을 것 같던 문장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대개 감정을 설명하던 문장이었다.


사유는 감정을 없애는 일이 아니다. 감정에 이름을 붙이기 전에 오래 바라보는 일이다. 왜 화가 났는지보다 무엇을 보았는지, 왜 외로웠는지보다 그날 창밖에는 무엇이 있었는지를 묻는 일이다. 그렇게 바라보다 보면 감정은 조금씩 뒤로 물러나고 장면이 앞으로 걸어 나온다.


나는 여전히 뜨거운 마음으로 글을 쓴다. 다만 독자에게 건네는 문장만큼은 조금 식혀 두고 싶다. 내 감정을 이해해 달라고 손을 붙잡기보다, 한 장면을 조용히 내어놓고 그 앞에서 함께 오래 서 있을 수 있는 글. 설명보다 여백이 오래 남는 글.


좋은 글은 많은 것을 말하는 글이 아니라, 오래 생각하게 만드는 글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문장을 쓰기보다 먼저 바라보려 한다. 마음이 들끓는 속도보다 사유가 천천히 따라오기를 기다리면서.

이전 06화어느 전업주부의 인지적 폭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