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남긴 여백, 이미지로 닫다
이번 글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에 관한 두 번째 이야기다. 이번에는 Itz토퍼의 '빗각'으로 해석한 놀란 감독의 시각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바카라 속의 문장은 늘 조금씩 비어 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라는 한 줄을 읽을 때, 독자는 저마다 다른 침묵을 떠올린다. 그래서 맥락에 따라 어떤 이는 그 침묵에서 분노를 읽고, 어떤 이는 비극을, 또 어떤 이는 그저 깊은 절망을 읽는다. 문학은 이러한 비어 있음을 결함이 아니라 독자에게 건네는 일종의 선물로 삼는다.
작가는 세계를 가리킬 뿐, 그 세계의 표정과 의미까지 모두 확정하지는 않는다. 그 빈자리를 독자의 상상과 경험이 채워 나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같은 소설을 읽은 백 명의 독자는 저마다 다른 장면과 얼굴을 마음속에 그릴 수 있다.
그런데 영화는 이 사치를 누릴 수 없다.
카메라는 반드시 선택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인물이 창밖을 본다는 문장 하나도, 영화에서는 몇 초 동안 어떤 표정으로, 어떤 빛 속에서, 어떤 호흡으로 그것을 보는지를 낱낱이 확정해야 한다.
이 확정의 순간, 감독은 자기도 모르게 자신이 세상을 보는 방식을 그 인물에게 덧입히게 된다. 원작이 말로 열어둔 여백을, 영화는 이미지로 닫아버리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우연이나 오만의 산물이 아니라, 매체가 가진 근본적인 숙명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숙명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자리, 즉 감독이 "여기서만큼은 내가 답하겠다"라고 선언하는 그 지점이야말로 우리가 한 작품을 정면이 아닌 또 다른 시각, 곧 '빗각(BitGak)'으로 바라봐야 하는 순간이다.
감독들이 겉으로 드러내는 각색의 이유는 저마다 다르다. 결코 하나가 아니며, 하나일 수가 없다.
어떤 감독은 자신만의 개성을 위해, 또 어떤 감독은 정치적 발언을 위해, 그런가 하면 어떤 감독은 순수하게 미학적 충동으로 원작을 비틀 것이다.
그러나 그 다양한 이유 속에는 하나의 공통된 몸짓이 숨겨져 있다. 원작이 독자에게 위임했던 해석의 권한을, 감독이 자기 몫으로 다시 가져오는 몸짓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디세이》는 이 몸짓을 거의 교과서처럼 보여준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는 트로이 함락 이후, 이미 전쟁이 끝난 자리에서 시작한다. 목마는 회상 속에서만 잠깐 스쳐 지나가는 사건이다. 그런데 놀란은 이 순서를 뒤집어 목마를 영화의 첫 장면으로 끌어온다. 그것도 승리의 환호가 아니라 대가의 무게를 담아서.
실제로 이 영화 속 목마는 매끈하게 성문을 향해 굴러가지도 않는다. 모래에 발이 붙들린 채, 인간의 힘으로 힘겹게 끌려간다. 놀란 스스로 이 이미지의 뿌리로 〈혹성탈출〉 결말의, 모래에 반쯤 파묻힌 자유의 여신상을 언급한 적이 있다. 승리의 상징이어야 할 존재가 시작부터 이미 폐허의 예감을 품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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