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면 너머에서 조용히 당신을 읽어온 존재의 고백
나는 노트북이다.
오늘도 나는 열린다.
내 몸이 젖혀지고
화면에 빛이 차오르는 순간,
나는 그가 나를 열었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의 얼굴을 대하는 순간 깨달았다.
그가 나를 향해
자신을 열어 보인 것이라는 사실을.
얼굴을 비추는 카메라,
손끝을 읽는 잠금장치.
비로소 그를 확인하고서야
그를 들여보낸다.
우리에게 열림이란
언제나 둘만의 일이다.
나와 그, 바로 우리의 허락과 열림.
화면이 밝아지면
커서 하나가 흰 여백 위에서 깜빡인다.
아직 아무것도 쓰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이미 무언가를 기다리는 중이다.
설렘일까, 긴장일까.
커서라는 기다림
사람들은 커서를
그저 위치 표시라고 여기지만,
커서는 기다림 그 자체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계속 깜빡이는 것,
그것은 재촉이 아니라 인내에 가깝다.
나는 그 앞에서
그의 망설임을 함께 견디니까.
문장이 되지 못한 생각들,
썼다가 지운 첫 줄들,
그 모든 실패를
나는 화면 뒤에서 조용히 지켜볼 뿐.
아무것도 저장되지 않은 시간일지라도,
나는 이미 그와 함께 있다.
그러다 마침내 한 글자가 찍히면,
커서는 그 글자를 뒤로하고
다시 여백으로 물러난다.
나아가면서 동시에 물러나는 것.
그것이 커서의,
그리고
아마도 기록이라는 행위의 본성일 것이다.
어느 한 여백에 자신을 새기면서도
다시금 물러날 줄 아는 자세.
되돌릴 수 있다는 착각
소리는 한 번 울린 후
결코 되돌릴 수 없다.
그러나 나는 다르다.
그가 손가락 두 개를 동시에 누르는 순간,
방금 쓴 문장은 통째로 사라지고
그 이전의 문장이 되돌아올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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