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머무는 선율의 궤적 (제5편)
오늘 새벽, 커피 대신 생강차 향이 서재에 가득하다.
그 옆으로 한 선율이 조용히 흐르고, 두 기운은 나를 오래전, 사랑과 열정으로 뜨겁던 젊은 시절로 이끈다. 쉼 없는 노동과 휴식 부족으로 인해 조금은 지친 나를 치유하면서.
타이완의 원주민 타이야족(Atayal) 이 살고 있는 산상 마을.
학생들과 함께 봉사활동을 떠났을 때의 일이다. 고산지대답게 갑작스러운 일기 변화로 장대비가 무섭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예측하지 못한 우리에겐 아무런 대바카라이 없었다.
결국 아열대림에서 자라는 커다란 풀잎을 꺾어 우산 삼아 가며 비탈진 산길을 올랐다. 온몸은 이미 땀과 빗물로 흠뻑 젖었고, 산등성이를 타고 흘러내리던 누런 황토에 절어 흰 운동화는 어느새 황금빛으로 거칠게 물들어 있었다.
다행히 모두가 안전하게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주민들은 미리 마중을 나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다정하게 우산을 받쳐주었다. 이윽고 젖은 몸으로 집 안에 들어섰고, 그들이 건네준 따뜻한 생강차는 온몸의 한기를 녹여주었다.
그날 밤, 세차던 비가 그치고 까만 밤하늘을 수놓은 은하수를 바라보며 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한 학생이 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했고, 익숙한 선율이 흘러나왔다.
'가브리엘의 오보에(Gabriel's Oboe)'였다.
고산 밀림의 밤안개가 걷힌 하늘 위로 수많은 별이 반짝이고, 모닥불 곁에서 차를 마시며 듣던 그 연주는 말없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마치 이 자리에 앉아 있으면 가브리엘 신부가 어디선가 우리를 향해 걸어올 것만 같은.
비록 우리는 어느 누구도 신앙이나 삶의 고단함에 대해 거창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지만, 산상의 밤하늘로 울려 퍼지는 오보에 소리만으로도 온 가슴이 평안으로 가득 찼다.
그 순간, 오보에는 더 이상 단순한 악기가 아니었다.
누군가의 가장 다정한 목소리가 되어 우리 속 깊은 곳의 문을 두드리는 듯. 그 설명할 길 없는 깊은 울림은 모두의 가슴에 전율을 만들고 작은 감동의 여운을 남기고 있었다.
오보에는 악기라기보다 차라리 하나의 목소리에 가깝다는 말, 나는 그때 비로소 절감했다.
그것도 곱게 정제된 맑고 투명한 소리가 아니라, 가쁜 숨이 섞이고 온전치 못한 떨림이 묻어나는 너무나 인간적인 목소리. 첫 음을 내기 전 연주자가 들이마시는 짧은 숨소리에서부터 오보에는 이미 이야기를 시작하는 듯 했다.
마치 누군가가 첫마디를 떼기 직전, 망설임 속에서 뜨거운 감정이 먼저 새어 나와 버리는 그 아스라한 순간처럼.
금관악기처럼 당당하게 뻗어 나가지도 않고 현악기처럼 화려한 화음을 빚어내지도 못하지만, 오보에는 오직 단 하나의 선율과 단 한 줄기의 숨으로 사람의 마음에 곧장 도달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악기를 가리켜 '인간의 목소리를 가장 닮은 악기'라 부르나 보다.
언젠가 한 오보에 연주자로부터 이 악기에 얽힌 비밀을 전해 들은 적이 있다.
사람들이 오보에를 사람의 목소리 같다고 느끼는 것은 결코 우연이나 막연한 비유가 아니라고. 실제 오보에가 소리를 내는 원리는 '이중 리드(double reed)'에 있는데, 얇게 깎아낸 두 개의 갈대 조각이 서로 입을 맞추듯 맞닿아 떠는 그 단순한 구조란다. 그건 마치 우리의 성대가 호흡을 만나 진동을 만들어내는 방식과 닮아 있다는 것이다.
그가 내밀어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만져보았던 리드는 그저 메마르고 단단한 식물의 조각에 불과했다. 그러나 연주하는 이의 온기 어린 숨이 그 좁은 틈새로 스며드는 순간, 침묵 속에 잠겨 있던 식물이 마침내 잠에서 깨어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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