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상처는 추억보다 깊게 새겨질까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뇌가 상처를 기억하는 생존의 법칙

byItz토퍼
일러두기: "지금은 정말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한데, 왜 잊고 지내던 과거의 상처가 자꾸 떠올라 나를 괴롭힐까요?" "왜 과거의 고통이 오늘도 나를 따라다닐까요?"라고 묻는 이들에게 이 글을 바칩니다.

그리고 본 내용은 참고용으로만 사용하시기 바라며, 전문적인 심리상담이나 의학적 진단이 필요한 경우 전문가를 찾아주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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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에 있던 화재경보기가 고장 난 적이 있다.


창문을 열어두었더니 아래층에서 생선을 굽는 연기가 올라왔는데, 고장 난 경보기가 이를 화재로 오인하고 요란하게 울려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에는 아내가 국을 데우려고 냄비를 올려놓고 깜빡 잊은 채 머리를 감는 사이, 솥이 숯검정이 되도록 타버리는 일이 있었다. 집 안은 순식간에 자욱한 연기로 가득 찼음에도 정작 경보기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뒤늦게 이를 알아차린 아내는 결국 솥 하나를 통째로 태워버리고 말았다.


이렇듯 경보기의 오작동이나 고장은 단순한 불편을 넘어 때로는 심각한 위험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사실 우리 몸에도 이와 아주 비슷한 ‘경보기 시스템’이 존재하고 있다. 그리하여 어떤 이들은 마치 아주 작은 자극에도 시도 때도 없이 울려대는 고장 난 경보기와 평생을 함께 살아가듯, 늘 긴장과 불안 속에서 고단한 삶을 힘겹게 이어간다.


우리는 이 꺼지지 않는 경보기를 '트라우마'라고 부른다.




해발 수천 미터의 고산마을로 의료팀을 이끌고 봉사를 떠났던 때의 일이다.


마지막 일정을 모두 마치고 기분 좋게 돌아오려는데 유난히 거센 장대비가 쏟아졌고, 일정상 더 머물 수 없었던 우리는 결국 빗속을 뚫고 위험한 하산을 시작해야만 했다. 하지만 좁은 산길을 내려오던 중, 우리가 탄 승합차가 산사태로 밀려 내려온 토사에 휩쓸리며 순식간에 수백 미터 아래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대형 사고가 발생하고 말았다.


다행히 차량이 기적적으로 나무와 덩굴에 걸리면서 완전히 추락하는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뒤집힌 차 안에 거꾸로 매달린 채 머리로 피가 쏠리는 극심한 고통을 견뎌야 했고, 서로가 얼마나 다쳤는지조차 확인하지 못한 채 공포에 떨며 구조의 손길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끔찍했던 한 시간이 흐른 뒤에야 현지 주민들에 의해 구조될 수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동승자 한 분이 치료 과정에서 끝내 세상을 떠나셨고, 살아남은 이들 역시 심각한 상처는 물론 마음 깊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라는 씻을 수 없는 흉터를 안게 되었다.


심리학을 업으로 삼아온 나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머릿속 지식으로 마음을 분석하는 일과 온몸의 세포가 기억하는 날것의 공포를 마주하는 일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임을 뼈저리게 느껴야 했다. 무너져 내리는 마음 앞에서 머릿속의 수많은 이론은 아무런 힘을 쓰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 또한 꼬박 1년 동안 폐소공포증 치료를 받으며, '머리로 아는 지식은 현실의 고통을 결코 이기지 못한다'는 뼈아픈 사실을 스스로 증명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사건의 크기와 관계없이, 마음의 한계를 넘어선 모든 충격은 우리의 내면에 언제 울릴지 모르는 불안한 경보기를 깊숙이 심어놓기 마련이다.


많은 이들이 치료되지 않은 과거의 상처는 그저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흐려져 사라질 것이라 굳게 믿곤 한다. 과연 정말로 그럴까?


안타깝게도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는 흔히 시간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지만, 충분히 치유되지 못한 기억과 감정은 마음 밑바닥에 무겁게 고여 있을 뿐 결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마치 물병 속에 가라앉아 있는 이물질처럼, 외부에서 아주 조그마한 진동이나 자극만 주어지면 물 전체를 순식간에 뿌옇게 흐려놓듯이 말이다. 그래서 평소에는 잊힌 듯 조용하다가도, 특정한 스트레스나 관계의 자극을 마주하는 순간 언제든 다시 깨어난다.


그리고 뇌와 신경계에 깊이 가라앉아 있던 그날의 경험은, 어느 날 유령처럼 불쑥 모습을 드러내 지금 이 순간 나의 감정과 삶을 뒤흔들어놓는 것이다.



기억은 공평하지 않다



세상에서 가장 불공평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기억'이라고 답하곤 한다.


불과 며칠 전에 먹었던 평범한 점심 메뉴는 일상이라서 그런지 긴가민가, 그런데 10년 전 누군가에게 깊이 배신당했던 슬픈 순간은 놀라울 만큼 선명하게 남아 있다. 심지어 그날 마셨던, 쓰기만 하고 커피 같지도 않던 아메리카노의 씁쓸한 맛과 냉기마저 손끝에 생생하게 만져지는 듯하다.


이렇듯 기억은 결코 모두에게 공평하게 흘러가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의 생존을 온전히 바카라임지는 '뇌'의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이러한 기억의 불공평함에는 실로 절박하고 타당한 생존의 이유가 숨어 있다.


1779921777.pngby Qwen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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