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는 또 다른 이름, 빈손

내가 원하는 배역이 아니라,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

byItz토퍼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우리는 ‘그’를 사랑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의 역할’을 사랑하는 것일까?

by ChatGPT


사랑이 시작될 때, 우리는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있다고 믿는다.


그의 말투와 표정, 사소한 습관까지 특별하게 느껴지는 순간, 마침내 한 사람을 알아보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를 알아본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내가 오래도록 기다려 온 무언가를 발견한 것은 아닐까?


외로운 사람은 자신의 외로움을 이해해 줄 사람을 찾고, 사랑받지 못했다고 느껴 온 사람은 자신을 온전히 채워 줄 사람을 찾는다. 그리고 마침내 누군가를 만나면, 우리는 그의 얼굴 위에 내가 기다려 온 환상을 겹쳐 놓는다.


그의 다정함을 ‘구원’이라 부르고,

우연한 만남을 ‘운명’이라 믿으며,

아직 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서둘러 ‘사랑’이라는 이름을 건넨다.


구원과 운명, 그리고 사랑.


그렇게 이어진 사랑을 누군가는 ‘천생연분’이라고도 말한다.


사랑은 그렇게 시작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된다.


한 사람을 향한 마음인 줄 알았지만, 사실 그 마음의 한가운데에는 내가 채우고 싶었던 빈자리가 놓여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내가 사랑한 그 사람 역시, 나와 닮은 빈자리를 품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서로의 빈자리를 알아보면서, 그 닮은 결핍을 서로에게서 발견했기에 운명이라 믿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천생연분이라 믿는 그에게 하나의 배역을 건넨다.


‘나를 이해해 줄 사람’

‘나를 버리지 않을 사람’

‘내 상처를 알아서 어루만져 줄 사람’


상대 역시 그 역할을 기꺼이 받아들이곤 한다. 사랑받고 싶은 사람은 사랑받을 만한 '그'가 되려 애쓰고,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은 사람은 기꺼이 타인의 빈자리를 채운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가 바라던 모습이 되어 주며 가까워지더라.


그러나 한 인간은 그 배역보다 훨씬 크더라.

그래서 내가 정해 놓은 빈자리의 범위를 늘 벗어난다.


그는 가끔 내가 기대하지 않은 방식으로 침묵하고, 내가 원하는 순간에 나 대신 다른 곳을 바라보더라. 나를 안심시키던 다정함은 무심함이 되고, 나를 특별하게 만들던 관심은 더 이상 나에게만 머물지 않는 것 같다.


그에게는 내가 알지 못하는 슬픔과 욕망이 있고, 끝내 나에게 다 설명하지 않는 마음이 존재하더라.

그때 나는 탄식하며 이렇게 말하게 될지도.


“그가 변했다.”

처음과 같지 않다고,

예전의 그가 아니라고.


하지만 정말 그가 변한 것일까.

아니면 이제야 그가 내가 원했던 배역과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일까?


그가 나를 이해해 주지 않을 때,

나는 이해받지 못하는 스스로의 외로움과 비로소 직면하고,


그가 나를 구원해 주지 않을 때,

사랑받는 것만으로는 사라지지 않는 내면의 상처를 발견하며,


그가 나를 완성해 주지 않을 때,

누구도 대신 채워 줄 수 없는 빈자리가 내 안에 고스란히 남아 있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 빈자리를 마주하기보다 자꾸 사랑을 의심하더라. 내 마음이 아니라 상대의 마음이 식었다고, 처음부터 잘못된 만남이었다고 잘라 말하기도 하더라.


그렇게 말해야 잃어버린 마음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일까?


하지만 우리가 정작 잃어버린 것이 그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그 사람을 통해 얻으리라 믿었던 환상이었는지는 쉽게 구분하지 못한다.


그러다 결국 하나의 질문 앞에 서게 되더라.

“그렇다면, 과연 나는 그를 계속 사랑할 수 있을까?”


나를 가끔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만 머물러 주지 않는 사람, 나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 사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사랑할 수 있을까?


어쩌면 진정한 사랑은 바로 이 질문에서 다시 시작되는지도.


사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 질문 이전에 내가 그에게 내렸던 정의가 얼마나 이기적이었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내게 무엇을 줄 수 있는지를 묻는 대신, 그가 나와 완전히 다른 타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 내가 알지 못하는 그의 세계가 늘 존재함을 인정하고, 나의 기대와 다른 모습까지도 그 사람의 일부로 바라보려 노력하는 일.


나는 과연 그런 사랑을 하고 있었을까?


물론 모든 것을 견뎌 내는 것만이 사랑은 아니다. 때로는 떠나는 것이 스스로를 지키는 유일한 길일 수 있다. 다만 떠나든 남든, 한 가지는 분명히 해야만 한다.


내가 누군가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듯, 이 세상 어느 누구도 타인을 완성하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마주해야만 한다.


아는가.

타인이 내 결핍을 온전히 채워 주길 바라는 마음이 얼마나 이기적인 것인지.


나는 그것을 사랑이라 믿었는데, 이기심이라니.


본래 사랑이란 결핍을 완전히 없애는 일이 아니라, 결핍을 가진 두 불완전한 존재가 서로를 있는 그대로 마주하는 일이니까.


우리는 서로의 외로움을 대신 짊어질 수 없고, 서로의 상처를 완전히 이해할 수도 없더라.


다만 오늘 그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고, 비록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 곁에 머물며, 상대를 내가 바라는 모양으로 고치려 하지 않는 것.


나아가 그가 나의 빈자리를 다 채울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를 하나의 온전한 인격으로 바라보려 애쓰는 것.


그 정도가 우리가 서로에게 해 줄 수 있는 전부가 아닐까.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처음부터 우리는 서로를 있는 그대로 사랑했던 것일까,

아니면 서로에게서 얻고 싶었던 환상을 사랑했던 것일까?”


그 둘을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는 날은 어쩌면 너무 늦게 도착할지도 모른다. 사랑에는 언제나 기대가 섞여 있고, 그 속에는 미처 깨닫지 못한 나의 결핍이 숨어 있으니까.


다만, 그 사람이 나의 기대와 달랐다는 이유만으로 함께했던 모든 순간이 거짓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서로를 오해했더라도, 그 안에서 기뻐하고 슬퍼했던 마음만큼은 분명 진실이었으니까.


사랑에는 착각과 투영이 얽혀 있었지만, 그 모든 불완전함 속에서도 우리는 서로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니 어쩌면 처음의 질문에 대한 답은 이 정도가 아니었을까.


나는 처음부터 ‘그’라는 진실을 사랑하지 않았다.

단지 내가 만들어 낸 '그의 환상'을 사랑했을 뿐.


그러다 그 환상이 무너지고 난 뒤에야 비로소 한 사람과 마주하게 된다. 내가 바라던 구원자도, 나를 완성해 줄 운명도 아닌, 자신만의 결핍과 불완전함을 껴안고 서 있는 한 낯선 이와.


그 앞에서 난는
자신으로부터 선택을 강요받는다.


떠나거나, 혹은 남거나.


남는다는 것은 그를 통해 나의 빈자리를 채우려는 기대를 계속 품는 것이 아니다. 그가 나의 빈자리를 결코 채울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불완전함과 함께 걸어갈 수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묻는 일이다.


그리고 자신의 이기적인 마음을 떠나보낸다.

어쩌면 사랑이 위대한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서로에게 모든 것을 줄 수 있어서가 아니라, 아무리 애써도 끝내 채워 줄 수 없는 빈자리가 있음을 알면서도 자신의 이기심을 내려놓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건네려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결코 서로를 완벽히 채우지 못한다.


그럼에도 한때 서로를 향해 뻗었던 손, 채울 수 없음을 알면서도 끝내 무언가를 건네려 했던 그 다정한 마음만은 영원히 남는다.


이기적인 사랑이 떠난 자리에는 이제 서로를 채우려 애쓰던 두 손은 없다. 대신 서로의 빈자리를 끝내 채워 줄 수 없음을 기꺼이 받아들인 두 사람의 따뜻한 '빈손'만이 남았다.




[어제의 글] "당신도 슬픔을 좋아하나요?"

[내일의 글] "글과 사람 사이에 놓인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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