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정서를 물어온 지인에게 답하다
아침 산바카라길에 만난 지인과 나눈 대화다. 그는 주말마다 밤을 새워 가며 한국 드라마를 본다는, 이전 글에 등장했던 인물이다. 그런 그가 내게 물었다.
“왜 한국인들은 슬픔을 좋아하나요?”
무슨 뜻이냐고 되물었다. 그는 한국 영화와 드라마에는 장르를 불문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애절한 슬픔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고 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부모의 헌신, 뒤늦은 후회와 용서, 그리고 가슴 아픈 재회까지. 한국 드라마에는 사람들의 눈시울을 붉히게 하는 장면이 참 많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한국 드라마를 볼 때는 반드시 휴지를 옆에 둔다면서 웃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정말 그렇기도 하다.
우리는 정말 슬픔을 좋아해서 그러는 것일까?
사람들은 누구나 현실에서 슬픔을 피하려고 애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싶지 않고, 이별하고 싶지 않으며, 후회할 일도 만들고 싶지 않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면 기꺼이 슬픈 이야기를 찾아보고, 주인공이 겪는 사랑의 아픔에 공감하며 눈물을 흘린다. 심지어 어떤 작품은 결말이 슬프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시 찾아보곤 한다. 그리고는 한참 슬픔에 빠져 있다가 이렇게 말한다.
“후련하다.”
"뭐가 후련하고, 왜 그럴까?"
아마 외국인들이 이 말을 들으면 슬픈 내용보다 우리들의 이 한 마디가 더 궁금해질 것이다.
솔직히 나도 그런 내가 궁금하다.
어쩌면 내가 좋아했던 것은 슬픔 자체가 아니라, 슬픔을 통해 비로소 드러나는 깊이 뭍혀 있던 사랑이 아니었을까?
평소에는 당연하게 여겼던 부모의 사랑도 부모가 우리 곁을 떠나고 난 뒤에야 절실하게 느껴지고, 곁에 있을 때는 미처 몰랐던 사람의 소중함도 이별을 겪고 나서야 깨닫게 되니까.
"우리는 왜 항상 잃고 나서야 뒤늦게 깨닫는 걸까?"
드라마 속 인물들이 눈물을 흘리는 순간, 우리는 그들의 아픔만 보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얼마나 사랑했는지, 얼마나 참고 견뎌 왔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말을 가슴속에 묻어 둔 채 살아왔는지를 비로소 읽어내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 드라마에는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하는 감정이 자주 등장한다. 자식을 위해 평생을 희생한 부모는 정작 자신의 외로움과 어려움은 이야기하지 못하고, 서로를 사랑하는 연인들은 마음과 달리 엇갈린 길을 걷기도 한다.
우리는 제삼자의 입장에서 그들의 침묵과 눈물을 바라보며, 말보다 더 깊은 마음을 읽어 내는 것은 아닐까.
그런가 하면, 한국 문화에서 흔히 이야기하는 ‘정’이나 ‘한’이라는 감정도 이런 장면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오랜 시간 함께하며 쌓인 정은 쉽게 끊어 낼 수 없고, 풀지 못한 아픔과 그리움은 마음 한구석에 오래 남는다. 물론 이런 감정이 한국인만의 것은 아니지만, 한국 드라마는 가족과 사랑, 희생과 그리움이 뒤얽힌 이야기를 통해 이러한 감정을 아주 섬세하게 표현할 줄 아는 것 같다.
또한 슬픔은 행복의 의미를 더 선명하게 만들어 주기도 한다.
아무런 갈등 없이 서로를 이해하는 사람들의 화해보다, 오랜 오해와 후회 끝에 건네는 한마디의 “미안해”가 더 큰 감동을 주는 것처럼. 아픔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깨닫는 마음이 있고, 잃을 뻔한 뒤에야 소중함을 알게 되는 관계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슬픈 이야기를 보면서도 그 안에서 위로와 희망을 발견한다.
또 한편으론, 드라마 속 눈물이 현실에서 쉽게 흘리지 못했던 우리 자신의 눈물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부모에게 미처 하지 못한 말, 떠나간 사람에 대한 그리움, 누군가에게 미안했던 마음을 드라마 속 인물의 이야기를 통해 대신 꺼내 놓는 것이다. 주인공의 슬픔에 공감하다 보면 어느새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되고, 마음속에 묻어 두었던 감정도 조금씩 그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인의 질문처럼, 한국인들은 정말 슬픔을 좋아하기 때문에 이러는 것일까?
나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우리는 슬픔 속에서도 사랑을 발견하고, 상실 속에서도 소중함을 깨닫게 하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
슬픔은 그 자체로 반가운 감정이 아니다.
하지만 슬픔은 우리가 무엇을 사랑하며 살아왔는지 가장 분명하게 보여 준다.
기쁨은 살아가는 즐거움을 알려 주지만, 슬픔은 내가 무엇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인지를 돌아보게 한다. 그러니 드라마를 보며 눈물 흘리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물어보면 어떨까.
“당신은 정말 슬픔을 좋아하나요? 아니면 슬픔 속에서도 끝내 사라지지 않는 사랑을 좋아하나요?”
어쩌면 우리가 눈물을 흘리는 이유는
단지 슬퍼서만이 아닐 것이다.
그 이야기 속에서
결국 우리 자신의 삶과 사랑을 발견하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