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수대비ㅡ일곱 왕의 시대를 건넌 여인
초롱초롱 박철홍의 조선사도 흐른다! 46
ㅡ 인수대비ㅡ
(일곱 왕의 시대를 건넌 여인)
'인수대비'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TV 드라마에 가장 많이 등장한 여성 가운데 한 명일 것이다.
아예 인수대비 본인을 주인공으로 하고 그 이름을 제목으로 내건 드라마까지 만들어졌을 정도다.
그럴 만도 하다.
인수대비, 즉 '소혜왕후 한씨' (昭惠王后 韓氏, 1437~1504)는 세종 때 태어나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을 거쳐 연산군> 때까지 살았다.
무려 일곱 왕의 시대를 건넌 여인이다. '세종' 때야 어린아이였으니 정치와 직접 관련이 없었지만 이후 조선왕조를 뒤흔든 굵직한 사건들 주변에는 거의 언제나 그녀와 그녀의 가족이 있었다.
남편은 왕이 되지 못하고 죽었지만 훗날 '덕종'으로 추존된 '의경세자'였고, 아들은 '성종'이었으며, 손자는 '연산군'이었다.
그녀 삶 자체가 조선 전기 왕실 역사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다.
인수대비 아버지 '한확'은 당시 조선 최고 권문세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더구나 한확 누이 두 사람은 명나라 '영락제'와 '선덕제' 후궁이 되었다. 한확은 누이가 영락제 후궁으로 들어간 뒤 명나라 관직인 '광록시소경'에 제수되기도 했고, 이후 조선의 대명외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명나라를 사대하던 당시 조선에서 명 황실과 직접 연결된 청주 한씨 가문의 위상은 대단할 수밖에 없었다.
인수대비는 바로 이런 집안에서 성장했다. 그래서 당시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한문과 유교 경전에 상당한 소양을 쌓았다. 훗날 직접 여성교육서인 '내훈'을 편찬할 수 있었던 배경이기도 하다.
1450년 문종 즉위년, 열네 살이던 한씨는 '수양대군' 큰아들 '도원 군'과 혼인했다. 그 뒤 시아버지 수양대군이 '계유정난'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고 마침내 '단종'에게서 왕위를 빼앗아 세조가 되면서 한씨의 운명도 크게 바뀌었다.
도원군이 의경세자가 되고 한씨도 세자빈 수빈이 되어 궁궐에 들어갔다. 후대에는 한씨가 계유정난 당시 거사를 망설이던 수양대군에게 용기를 불어넣었다는 이야기까지 전해진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정사에서 확실하게 확인되는 사실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분명한 것은 세조와 정희왕후가 큰며느리 한씨를 상당히 아꼈다는 사실이다. 세조는 그녀를 '효부'라고 부르며 칭찬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씨에게 생각지도 못한 비극이 찾아왔다. 1457년 남편 의경세자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것이다. 스무 살을 갓 넘긴 젊은 나이에 두 아들과 딸을 남겨두고 남편이 죽었다. 한씨는 왕비가 될 꿈을 눈앞에 두고 하루아침에 과부가 되었다.
세자 자리는 시동생 '해양대군' 에게 넘어갔다. 훗날의 '예종'이다.
한씨는 자녀들을 데리고 사가로 돌아갔다. 앞날이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시아버지 세조가 살아 있었고 시동생이 세자가 되어 있었다. 자신의 두 아들이 왕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세상과 완전히 인연을 끊지는 않았다. 둘째 아들 '자을산군'은 1467년 당시 최고 권력자 가운데 한 사람이던 '한명회' 막내딸과 혼인했다. 훗날 '공혜왕후'다. 이 혼인으로 자을산군은 한명회 사위가 되었다.
당시만 해도 이것이 조선 왕위 계승을 바꾸게 될 엄청난 혼인이 될 것이라고 누가 쉽게 예상했겠는가?
1468년 세조가 죽고 예종이 왕위에 올랐다. 젊은 예종은 아버지 세조가 남겨놓은 복잡한 권력구조 속에서 왕권을 강화하려 했다.
한쪽에는 한명회와 신숙주를 비롯한 '구공신'들이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세조 말년에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며 급부상한 '귀성군 이준'과 '남이' 같은 젊은 '신공신'들이 있었다.
예종은 즉위 당일 남이를 병조판서에서 물러나게 했다.
얼마 뒤 '유자광' 고변이 일어났고 예종은 직접 남이를 국문했다. 결국 남이와 '강순'은 역모죄로 죽었다. 귀성군도 정치적 중심에서 밀려났다.
동시에 예종은 한명회 같은 구공신들의 권력도 그대로 놔두려 하지 않았다. 젊은 왕이 왕권을 세우기 위해 여러 세력을 견제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때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1469년 11월, 즉위한 지 불과 1년 남짓 만에 예종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예종에게는 어린 원자가 있었다. 훗날의 '제안대군'이다. 또 의경세자의 맏아들 '월산군'도 있었다.
그런데 왕위는 이들에게 가지 않았다. 예종이 죽은 바로 그날, 정희왕후는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이자 한명회의 사위인 열세 살 '자을산군'을 후계자로 선택했다.
그가 바로 '성종'이다.
스무 살 무렵 남편을 잃고 왕실 밖으로 나갔던 한씨 아들이 하루아침에 조선의 왕이 된 것이다.
인수대비의 인생도 다시 한번 완전히 뒤집혔다.
예종 갑작스러운 죽음과 너무나 빠르게 이루어진 왕위 계승 때문에 훗날 여러 의혹도 따라붙었다.
정희왕후, 한명회, 그리고 성종 생모 한씨가 예종 죽음 뒤에 있었던 것 아니냐는 '독살설'도 그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이것을 역사적 사실처럼 단정해서는 안 된다. 예종이 갑자기 죽었다는 것, 그리고 그의 어린 아들이 아니라 한명회의 사위 자을산군이 곧바로 왕위에 올랐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정희왕후나 한명회, 인수대비가 예종을 독살했다는 직접적인 사료는 없다.
결국 역사에서 확인되는 사실은 여기까지다. 다만 바로 이런 기록의 빈틈 때문에 후대 사람들의 의혹과 상상력이 생겨났다.
나 역시 <조선의 아이돌>이라는 소설에서는 그 틈을 소설적 상상력으로 들여다보았다.
역사와 소설의 경계가 바로 이런 곳에 있다고 생각한다.
성종은 열세 살이었다.
당연히 수렴청정이 필요했다.
왕의 생모 한씨가 있었지만 그 위에는 시어머니 '정희왕후'가 살아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정희왕후가 문자를 알고 사리에 밝은 며느리 수빈에게 수렴청정을 맡기는 방안까지 거론했다는 점이다.
정희왕후는 글을 못 읽었다.
그러나 구공신들 반대로 결국 정희왕후 자신이 수렴청정을 했다.
한씨는 아들이 왕이 되었지만 처음부터 곧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인수대비'가 된 것은 아니었다. 궁궐에는 정희왕후와 예종의 왕비 안순왕후가 살아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지위를 어떻게 정할 것인가도 복잡한 문제였다.
1470년 의경세자가 왕으로 추존되면서 한씨는 '인수왕비'가 되었다.
1475년에는 '인수왕대비'로 존숭되었고, 그해 남편 의경세자에게 마침내 '덕종'이라는 묘호가 내려졌다.
왕이 되어보지 못하고 죽었던 남편은 죽은 지 18년 만에 왕이 되었다. 그리고 왕비가 되어보지 못했던 한씨 역시 마침내 왕비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참 기구한 운명이었다.
성종이 성장하면서 정희왕후의 수렴청정도 끝났다. 정희왕후가 세상을 떠난 뒤 인수대비는 명실상부한 왕실 최고 어른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인수대비의 삶에서 가장 논란 많은 사건이 시작된다.
'폐비 윤씨' 문제다.
성종 첫 번째 왕비 공혜왕후가 자식 없이 일찍 죽고, 후궁이었던 윤씨가 1476년 왕비가 되었다.
그해 아들도 낳았다.
훗날 '연산군'이 되는 '이융'이다.
그러나 성종과 윤씨의 관계는 곧 심하게 틀어졌다.
성종에게는 후궁이 많았다.
음주가무를 즐겼다.
성적으로도 자유스러웠다.
이를 둘러싼 질투와 갈등도 심했다.
실록에는 윤씨가 성종 얼굴에 상처를 입혔다는 기록을 비롯해 궁인들을 해치려 했다는 의혹과 대비에게 불손하게 행동했다는 내용까지 상당히 부정적으로 기록돼 있다.
물론 폐비가 된 뒤 승자 기록이라는 점도 생각하면서 읽을 필요는 있다. 분명한 것은 인수대비와 윤씨 사이에도 갈등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법도와 예절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던 인수대비가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며느리 윤씨를 좋게 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결국 윤씨는 1479년 왕비 자리에서 쫓겨났다. 그리고 1482년 사약을 받고 죽었다.
아무리 그래도 세자까지 낳은 왕비를 폐비하고 사사까지 한 것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오랫동안 대중에게는 이 모든 사건 뒤에 무서운 시어머니 인수대비가 있었던 것처럼 알려졌다.
드라마도 대부분 그렇게 그렸다.
그러나 실록을 자세히 따라가 보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인수대비가 폐비 윤씨를 강하게 비판했고 폐비와 사사 과정에 깊이 관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최종 결정을 내린 사람은 왕인 성종이었다.
특히 윤씨를 죽이는 문제에서는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성종 자신이 상당히 강한 의지를 보였다.
그러므로 폐비 윤씨의 비극을 전적으로 인수대비 한 사람의 바카라임으로 돌리는 것도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
아무리 인수대비가 왕실어른이었다 해도 세자 친어머니를 사사하는 엄청난 일을 성종 의지 없이 밀어붙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오히려 여기에서 성종이라는 인물의 또 다른 얼굴도 보인다.
온화한 성군으로 알려진 성종이지만 왕실질서와 자신 권위가 흔들린다고 판단했을 때는 매우 냉정했다.
한때 사랑했던 여인이었고 자신의 아들을 낳은 여자였다. 그럼에도 결국 죽음을 명했다. 정말 쉽지 않은 일인데 성종은 보란 듯이 해냈다. 후에 숙종이 따라 했다.
그 결정은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왕실에 엄청난 피바람이 되어 돌아온다. 폐비 윤씨 아들 연산군이 왕이 되었기 때문이다.
1504년 연산군은 생모 윤씨를 '제헌왕후'로 추숭 하고, 어머니 폐비와 죽음에 관여했던 사람들을 대대적으로 처벌했다.
조선의 두 번째 사화인 '갑자사화'였다.
피바람이 몰아쳤다. 그리고 그때까지 인수대비는 살아 있었다.
연산군에게 인수대비는 친할머니였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의 어머니를 죽이는 데 관여한 사람이기도 했다.
두 사람 사이가 좋을 리 없었다.
후대 야사에는 연산군이 인수대비에게 어머니를 왜 죽였느냐고 따지다가 격분해 머리로 인수대비의 가슴이나 배를 들이받았고, 그 충격으로 인수대비가 죽었다는 이야기까지 전해진다.
드라마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장면이다. 하지만 '연산군일기'에는 연산군이 인수대비를 머리로 들이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따라서 이것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다만 연산군과 인수대비의 관계가 크게 악화되었고, 갑자사화가 벌어진 1504년 인수대비가 병을 앓다가 세상을 떠난 것은 사실이다.
나이 예순여덟이었다.
갑자사화 피바람과 손자 원망이 노년 인수대비에게 상당한 정신적 충격을 주었으리라는 정도 추정은 가능할 것이다.
평생 법도와 효를 강조했던 인수대비가 마지막에는 친손자와 심하게 충돌했다.
참으로 역사의 아이러니다.
단순히 '고부갈등은 무섭다'라고 웃어넘길 일만은 아니다.
인수대비와 폐비 윤씨 갈등에는 왕실 권력과 왕위계승, 유교적 가족질서와 여성 지위가 모두 뒤엉켜 있었다.
그리고 한 세대 갈등이 다음 세대에 어떻게 더 큰 비극으로 되돌아오는지를 보여준다.
인수대비는 학문적으로도 조선 왕실 여성 가운데 매우 특별한 인물이었다. 어릴 때부터 한문과 유교 경전에 상당한 소양을 쌓았고, 1475년 '열녀', '여교', '소학', '명감' 등에서 여성의 교육에 필요하다고 생각한 내용을 뽑아 '내훈'(內訓)을 편찬했다.
'내훈'은 이후 오랫동안 조선왕실 사대부 여성들에게 중요한 교육서가 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처럼 철저한 유교적 여성윤리를 강조했던 인수대비가 불교에도 매우 깊은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이다.
불경간행과 사찰중수, 불교의례를 적극 지원했고 불교를 억압하려는 정바카라에 대해서는 신하들과 맞서면서까지 반대하기도 했다.
유교국가 조선 왕실 최고어른 이면서 동시에 상당히 적극적인 불교후원자였던 것이다.
인수대비 능은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에 있는 '경릉'이다.
그런데 경릉에 가보면 재미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남편 덕종 능보다 인수대비 능이 훨씬 왕릉답고 석물도 많다.
그렇다고 아내가 남편보다 힘이 세서 일부러 더 화려하게 만든 것은 아니다. 덕종은 살아 있을 때 왕이 아니라 세자 신분으로 죽었기 때문에 그의 무덤은 처음부터 세자묘 형식으로 조성되었다. 훗날 왕으로 추존된 뒤에도 석물을 새로 추가하지 않았다. 반면 인수대비는 왕후 예로 장례가 치러졌기 때문에 왕후릉의 모습을 갖추었다.
그래서 한 능역 안에 있는 부부 무덤 모습이 서로 다르다.
하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묘한 생각도 든다.
왕이 되어보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죽은 남편. 스무 살 무렵 과부가 되었지만 아들을 왕으로 만들고 마침내 조선왕실 최고 어른까지 올라선 아내.
두 사람의 서로 다른 능 모습이 마치 두 사람의 너무나 달랐던 인생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세종 때 태어나 문종과 단종의 시대를 지나고, 세조 며느리가 되었으며, 예종 형수가 되었고, 성종 어머니가 되었으며, 마지막에는 연산군 할머니로 생을 마친 여인.
일곱 왕의 시대를 건넌 인수대비.
그녀는 조선 최고권력을 누렸던 여인이기도 했고, 스무 살 무렵 남편을 잃은 비운의 여인이기도 했다.
엄격한 유교적 질서를 강조했던 교육자였고, 불교를 적극적으로 후원한 신앙인이기도 했다.
며느리의 죽음에 깊이 관여했고, 그 며느리 아들인 친손자에게 평생업보처럼 원망을 돌려받았다.
한 사람 인생 속에 권력과 가족, 사랑과 증오, 영광과 비극이 너무나 선명하게 겹쳐 있다.
그래서 5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인수대비 이야기가 수많은 드라마와 소설에서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제 인수대비 인생의 마지막을 뒤흔든 그 문제적 손자 이야기를 시작해보려 한다.
조선왕조에서도 손꼽히는 문제적 인간. 이융!
이어서 '연산군 1편'이 계속됩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