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만들까에서, 무엇을 해왔나로
이름을 걸기로 했으니, 이름 아래에 적을 말이 필요했다.
여섯 번 지원하는 동안 내가 낸 아이디어는 세 개였다.
이번에는 그 세 개를 하나씩 바카라상에 놓고 다시 따져 보았다.
첫 번째는 온라인 커머스였다.
커머스는 내가 가장 오래 한 일이었다.
그래서 낸 아이디어가 가젯 스토어였다. 그런데 직접 팔려고 하니 재고와 투자가 먼저 나왔다. 팔려면 물건이 있어야 했고, 물건은 재고가 되어 돈을 묶었다.
내가 아는 커머스는 남의 물건을 잘 팔게 하는 일이었지, 내 돈으로 물건을 쌓는 일이 아니었다.
두 번째는 슬롯문제를 푸는 AI 솔루션이었다.
실버 세대가 겪는 디지털 역차별을 풀어 보려 했다. 좋은 일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좋은 일과 값을 치르는 일은 달랐다.
슬롯문제에서는 돈을 낼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시장성이 나오지 않았다.
세 번째는 50대 퇴직자를 위한 협업 플랫폼, 모자이크였다.
지금 내가 겪는 일이니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시장을 보니 이미 너무 많은 서비스가 나와 있었다.
아이디어를 구체화하려고 검색을 할수록 관련 서비스 광고가 내 화면에 몰려들었다.
내가 아는 문제와 내가 이길 수 있는 자리는 다른 말이었다.
여섯 번의 서류는 이 세 개를 번갈아 담았다.
세 개 모두 접고 나니 아이디어는 남지 않았고 질문만 남았다.
나는 무엇을 잘하는가. 무엇을 할 때 가장 즐거웠는가.
돌아보니 즐거웠던 일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아무도 하겠다고 하지 않아서 접힌 일을 내가 맡았을 때였다.
아무도 맡지 않겠다던 글로벌 사업이 그랬다. 아무도 기간 안에 열 수 없다던 D2C가 그랬다. 처음부터 끝까지 끌고 가서 성공적으로 마무리했을 때, 나는 가장 즐거웠고 보람을 느꼈다.
26화 프롤로그에서 스스로를 정의한 문장이 있었다. 실행 중심으로 모두가 포기한 업무를 진행했다.
그 문장은 명함을 채우려고 지어낸 말이 아니었다. 내가 늘 해 왔고, 가장 즐거워했던 일을 그대로 적은 것이었다.
그동안 나는 무엇을 만들까만 찾고 있었다. 그런데 답은 새것이 아니라, 이미 해 온 일 안에 있었다.
다만 그 일을 한 줄로 적기는 쉽지 않았다.
컨설팅이라고 쓰면 너무 흔했고, 솔루션 개발이라고 쓰면 처음 보는 사람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내가 무엇을 하는지, 구체적으로 말하지 못하고 있었다.
홈페이지에 적은 순서는 이랬다.
멈춘 프로젝트를 진단하고, 실행 구조를 다시 세우고, 그 일을 풀어 주는 AI 도구를 직접 만든다. 컨설팅에서 시작해, 그 안에서 반복해서 만난 문제를 풀어 줄 솔루션 개발로 이어지는 일이다.
맨 위에는 한 줄을 적었다.
"도구보다 기준을 먼저."
그 아래에는 이렇게 적었다. 성장기 커머스·서비스 기업의 AI·DX 실행 파트너.
접었던 커머스가 한 줄 안에 돌아와 있었다. 물건을 파는 사람이 아니라, 커머스를 해 본 사람으로.
이름은 하나가 되었다.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도 처음으로 한 줄이 되었다.
다만 그 한 줄을 믿어 줄 사람 앞에 내놓을 증거는 아직 이력서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