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류는 여섯 번 떨어졌고,
사람 앞에선 한 번 선택됐다

나를 읽은 곳은 여섯 군데였고, 나를 아는 사람은 한 명이었다

by산에태양

교육은 네 시간이었다.

그 네 시간이 끝나고 나는 며칠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수백 대 일이라는 숫자는 이해가 됐다. 많은 사람이 지원하고, 몇 명의 심사위원이 합격을 정한다. 그게 시스템이라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나도 27년 동안 서류를 읽고 사람을 고르는 쪽에 앉아 있었다. 고르는 쪽에서는 그 방식이 합리적이다. 모든 사람을 직접 만날 수는 없으니까.

그런데 걸러지는 쪽에 앉아 보니 다르게 느껴졌다. 아쉬웠다. 아이디어가 나빠서 떨어진 게 아니라고 했다. 사업 추진 방안이 틀에 맞는 문서로 정리되지 않아서 떨어진다고 했다. 내용이 아니라 모양이 문제라는 말이었다.

시스템을 탓할 일은 아니었다. 문서로 옮기지 못한 건 나였다. 알고 있는데도 자존심이 상했다. 사업계획서를 쓰고 판단해 온 사람이, 사업계획서 쓰는 법을 네 시간 배우고 나서야 왜 떨어졌는지 알게 됐다는 사실이.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구직 사이트에 다시 접속했다. 새로 올라온 공고를 훑고, 자격증 시험 일정을 확인했다. 부동산, 건물 관리, 소방안전. 접수 기간이 언제인지, 응시료가 얼마인지까지 봤다. 나이 든 사람이 갈 수 있는 자리, 자격증이 있으면 길이 열린다는 자리들이었다.

신청 버튼 앞에서 손이 멈췄다. 그 자격증들이 하찮아서가 아니었다. 27년 동안 IT와 사업으로 일해 온 사람이 전혀 다른 분야의 자격증을 따서 그쪽으로 취직해야 한다면, 지난 27년은 어디로 가는 걸까. 내 경력 전체를 부정하는 것 같아서 누를 수가 없었다. 그냥 앉아 있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자신감이 눈에 띄게 떨어져 있었다. 한 줄로 줄이면 이런 상태였다. 여섯 번 떨어졌고, 그 이유를 이제 알게 됐고, 그래서 더 할 말이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유 퀴즈〉라는 프로그램을 봤다. 어떤 사람이 인터뷰에서 절망에 빠져 있던 시기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때 그는 하루 10분이라도 햇볕을 맞으려 했다고 했다. 밖으로 나가서, 그냥 앉아 있었다고.

대단한 해법이 아니었다. 그래서 오히려 믿을 만했다.

다음 날 밖으로 나갔다. 운동도 다시 시작했다. 안양천을 걸었다. 사람이 없는 시간을 골랐다. 늦은 밤이거나, 오전 열 시였다. 그 시간의 천변에는 나를 알아볼 사람도, 요즘 뭐 하시느냐고 물을 사람도 없었다. 햇볕은 오전에만 있었다. 선크림도 바르지 않았다.

그 걸음이 무언가를 해결해 주지는 않았다. 다만 그날부터 머릿속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던 시간에는 같은 문장만 돌았는데, 밖에 나와 걷고 있으니 다른 질문이 들어올 틈이 생겼다.

며칠 뒤 종이를 한 장 꺼냈다. 회사에서 안건이 막힐 때마다 하던 일이다. 선택지를 적는다.

하나, 재취업을 계속한다.
둘, 같은 아이디어로 일곱 번째 지원서를 쓴다.
셋, 아이디어를 바꿔서 다시 도전한다.
넷, 다른 분야의 자격증을 따서 새로 취직한다.

네 줄을 적고 나서야 공통점이 보였다. 전부 누군가 나를 읽고 판단해 줘야 하는 길이었다. 채용 담당자든, 심사위원이든, 자격증을 보고 뽑는 사람이든. 읽는 사람만 달라질 뿐, 나는 계속 서류 위에 있었다. 며칠 동안 구직 사이트와 자격증 일정을 오간 것도 같은 일이었다. 어떤 서류에 나를 맞출지만 보고 있었다.

여섯 번 떨어진 서류를 한 줄로 줄여 봤다.

나를 모르는 사람이, 수백 장 중 한 장으로 나를 읽었다.

그들은 내 27년을 알 방법이 없었다. 알 필요도 없었다. 그들이 볼 수 있는 건 칸에 적힌 것뿐이었고, 그 칸을 나는 이력으로 채웠다.

그런데 같은 해에 나는 한 번 선택된 적이 있다.

25화의 그 일이다. 공고에도 없던 자리였고, 지원서도 내지 않았다. 이력서는 한 장도 오가지 않았다. 소주를 같이 마신 임원이 내 이름을 댔고, 금액은 상대가 먼저 말했다. 계약서에는 회사명 대신 내 이름이 적혔다.

두 장면을 나란히 놓고 보니 이상했다. 같은 사람이고 같은 27년이다. 오히려 서류 쪽이 더 정돈돼 있었다. 몇 번씩 고친 문서였으니까.

달라진 건 읽는 사람이었다. 서류는 나를 모르는 사람이 읽었고, 첫 일은 나를 아는 사람이 정했다. 그 임원이 기억한 건 내 직함이 아니었다. 소주잔을 앞에 두고 혼잣말처럼 던진 한마디였다. 이제는 내 일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그 한마디가 어느 지원서보다 멀리 갔다.

여기서 멈추면 위로가 되는 이야기다. 서류가 나를 몰라줬을 뿐이라고. 그래서 한 번 더 따져 봤다.

첫 일에서 내가 한 건 사실 거의 없다. 그 자리를 만든 건 그 임원이었다. 나는 그가 내 이름을 댄 줄도 몰랐다. 한 번 선택된 걸 실력이라 부르기엔 표본이 하나였다. 다시 해 보라고 하면 나는 어떻게 하나. 그런 사람이 또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그건 서류 결과를 기다리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기다리는 대상이 사람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종이로 돌아갔다. 다섯 번째 줄을 적었다.

다섯, 내 이름으로 직접 판다.

그 줄 옆에는 마감일도, 접수 창구도, 심사위원도 없었다. 지원서를 내려면 칸이 있어야 하는데, 이 길에는 칸이 없었다. 강사가 칠판처럼 띄워 두었던 질문을 이번에는 서류가 아니라 내가 직접, 사람 앞에서 답해야 했다.

27화에서 나는 검증받으며 가겠다고 했다. 그 말은 지금도 틀리지 않다. 다만 검증이라는 말을 쓸 때 나는 늘 심사하는 사람을 떠올렸다. 정부 기관의 심사위원. 바카라상 위의 서류. 그리고 그 서류에서 나는 여섯 번 걸러졌다.

검증은 받기로 했었다.
누구에게 받을지는, 그때까지 정하지 않았다.


월, 수, 금 연재
이전 03화죄송합니다, 라는 답장을 여섯 번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