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은 한자리에서 생을 시작하고 마감한다. 씨앗에서 태어나 주어진 자리에서 초봄 찬 바람 이겨내고, 어린잎 탐하는 곤충의 식탐을 용케 피하여 살아남은 작은 식물은 처음 몇 장의 잎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한다. 식물의 삶을 속속들이 알지는 못하지만, 초등학교에서 배우는 광합성의 원리를 생각하면, 시작은 어리고 여린 잔뿌리일 것이다. 잔뿌리에서 흙 속의 양분과 수분을 빨아올려 잎으로 올려주면 잎에서는 스스로의 녹색 엽록소와 햇빛, 뿌리가 보내준 물, 그리고 공기에서 얻은 이산화탄소로 광합성을 시작한다. 이러한 생존의 노력으로 녹말과 산소를 얻게 된다.
녹색 잎을 가진 세상 모든 식물은 인간에게 축복이라 생각하는데, 잎이 만들어주는 산소 덕에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식물 입장에서야 스스로 생존을 위한 생산 활동의 부산물을 내뿜는 것이겠지만, 식물이 생존에 대한 노력을 게을리했다면 충분한 산소를 얻지 못하였을 것이기에, 그들의 생존을 향한 열망에 경외감이 느껴진다.
뿌리에서 수분을 끌어올려 준 덕분에 양분을 생산했으니 잎도 이제 그 빚을 갚아야 하는데, 자연계 대부분의 순환 구조가 그러한 것처럼 빌려 쓰고 갚아가는 것이 균형 있다. 잎에서 생산한 양분은 흔히 녹말 또는 전분이라 부른다. 집에서 감자튀김을 하거나 감자로 요리를 할 때 썰어서 물에 담가 놓으면서 빼내는 그것이다. 대부분 식물의 중요한 양분인 녹말은 잎에서 생산하여 체관을 통해 식물 구석구석으로 보내진다. 호박의 열매가 영글고, 통통한 가지가 가지가지 열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도시농부에게 주어지는 수확의 기쁨은 세상 모든 식물 잎이 생존을 위해 해가 뜬 동안 끊임없이 노력한 결과이다.
뿌리에서 시작한 생존의 여정이 줄기와 잎을 거쳐 열매로 맺는 과정을 지켜보면, 식물과 사람의 차이가 크지 않음을 알게 된다. 식물이 동트는 아침부터 광합성을 시작하여 해 질 무렵 일과를 마무리하고 휴식에 들어가는 모습에서, 사람의 일상과 다름없음을 본다. 가끔 병들고 지쳐 한여름 햇살 앞에서 모든 잎을 늘어뜨리고 있는 식물을 보면, 아픈 날 모든 걸 내려놓고 이불속에 누워 힘든 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리는 사람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한 줌의 빛이라도 더 받아들이기 위해서 잎을 키우고, 키를 높이는 식물의 모습은 생활을 지키기 위해서 경쟁 속에서 애쓰는 사람의 모습과 많이 닮았기도 하다.
식물과 사람이 닮은 점은 또 있다. 식물의 삶을 지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잎이 녹색인 이유는 잎이 녹색의 빛을 반사하기 때문이다. 잎은 청색과 적색을 자신 안에 받아들여 그 파장의 에너지를 흡수하고 녹색은 밖으로 돌려보낸다. 덕분에 우리 눈에 식물의 잎은 싱그러운 녹색으로 보이지만, 실상 세상의 모든 녹색 잎은 청색과 적색을 먹고 자라고 있는 것이다. 식물의 잎이 녹색을 반사하는 이유를 나로서는 알기 어렵지만, 그 덕분에 햇빛 가득한 계절에 세상이 녹색으로 넘쳐나는 것에 감사한 마음이다.
식물의 잎이 광합성을 위해 청색과 적색을 담아내는 것에서, 열정과 냉정 그 사이 어느 지점에서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생존의 길을 찾아가는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한순간의 찬란한 미소를 짓기 위해 수많은 고뇌와 어려운 결정을 소용돌이치는 감정 속에 녹여내는 시간이 식물 광합성의 과정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어쩌면, 생명을 이어간다는 같은 목적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식물이 성장하기 위한 에너지 생산의 공이 잎에 있다 했지만, 생존을 위해서 중요한 역할에 꽃을 빼놓을 수는 없다. 잎은 스스로의 힘으로 광합성을 하기 위해서 잎을 넓게 펼치거나 많이 펼치는 수고로운 노력이면 되지만, 꽃은 그것만으로는 안된다. 나비나 벌과 같이 수분에 도움을 주는 곤충 눈에 띄기 위해 화려한 색으로 치장하고 유혹적인 만찬을 준비해야 한다. 그렇다 보니 혼자 성실하면 그만인 잎에 비해서 꽃은 화려할 수밖에 없다. 세상에 녹색 꽃이 흔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 있지 않을까 싶다. 아마도 처음 세상은 녹색 꽃으로 뒤덮여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 생존을 위한 수분에 도움을 주는 벌과 나비와 같은 곤충에게 다음 세대의 탄생을 의지해야 하는 때부터, 화려한 색과 맛난 감로를 제공하는 식물이 살아남은 것이 아닐까 상상해 본다.
그러고 보니 세상 많은 식물 잎이 녹색의 빛을 내뿜는 것은 꽃을 배려하는 마음이 쌓여온 것은 아닐까? 그 많은 잎이 각자의 색으로 아름답게 치장했다면 벌과 나비는 꽃을 찾아갈 수 없었을 테니 말이다. 잎의 배려가 먼저 시작되었는지, 녹색의 잎 속에서 눈에 띄는 꽃으로 생존의 길을 찾아낸 식물이 자연의 경쟁에서 살아남은 결과가 지금의 모습인지 나로서는 알기 어렵지만, 배려의 결과이든 경쟁의 산물이건 자연이라는 큰 존재가 지금의 모습을 그려낸 것만은 틀림없으리라.
도시에서 농부로 살아가다 보면 경쟁 세상에서는 만나기 어려운 우연한 인연을 얻기도 하는데, 그중에는 이웃 마을에서 꽃 가꾸기를 사랑하는 이도 있었다. 원예 수업에서 만난 인연으로 연락을 주고받은 그분은 가족을 모두 떠나보내고 홀로 살아온 시간이 십수 년이라고 하였다. 처음에는 혼자 있는 외로움을 쓸어내려 반려동물과 함께 생활하기도 했지만, 어려운 형편에 반려견이 아플 때 제대로 된 치료를 해주지 못했다 한다. 반려견을 떠나보낸 뒤에는 본인보다 오래 살 수 있는 무언가를 찾다가 만난 것이 꽃이라고 했다.
작은 집 햇빛 잘 드는 배란다 한쪽에 놓여 있는 작은 정원에는 이름을 알기 어려운 작고 예쁜 꽃이 가득했다. 도시농부 생활을 경험하기는 했어도 평소에 반려식물이라는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였는데, 꽃에 대한 그분의 애정을 보면서 반려식물도 충분히 의미 있는 존재라는 것을 배웠다.
사람마다 조금 다르겠지만, 애정이라는 감정은 마음 안에서 자라나는 감정이다. 그리고 이 감정은 꽤나 묵직한 무게감이 있다. 제대로 가꾸고 잘 쌓인 애정은 베풀 수 있을 때 함께 나누는 이에게 행복과 기쁨이 된다. 그래서 잘 쓸 수 있다면 그만큼 귀한 것이 없는 것이 애정이지만, 애정은 꽤나 무겁다. 그래서 쌓이고 쌓이다 보면 그 무게가 스스로를 짓누르고, 감정의 마당에 균열을 가져오기도 한다. 그 균열 사이에서는 외로움, 그리움과 같이 삶의 경험 속에서 담아온 잔상들이 흘러나온다. 애정을 쌓지 않을 방법을 찾거나, 쌓인 애정을 즐겁게 나눌 대상을 찾지 못하면, 그 무게만큼의 그리움과 외로움이 찾아든다. 나에게 있어 사람과 반려하는 모든 존재는, 애정을 나눔 할 수 있는 대상인데, 그분의 생활을 보면서 반려식물도 충분히 반려할 수 있는 존재의 의미가 있다고 느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식물도 자신의 생존을 위해 애쓰는 사랑받을 자격 있는 생명인 것이다.
그분이 특별히 아끼는 꽃은 꽃 잔디였는데, 유일하게 돈 주고 사 온 꽃이라고 했다. 한 줌밖에 안 되던 꽃 잔디가 배란다 화단 가득 넓게 퍼지는 풍경에 기뻐하던 모습이 기억난다. 깊게 팬 주름 사이에도 미소 가득한 모습은 행복한 파장을 일으켰다. 꽃 잔디를 아끼던 그분은 얼마 전 소천하셨는데, 나는 그분이 아끼던 꽃 잔디 한 움큼을 얻어다가 햇빛 잘 드는 길가에 심어 주었다. 다행히 꽃 잔디는 잘 번식하고 퍼져나가는지라 그 자리에서 잘 자라주었다.
휴일 이른 아침, 생각할 일 가득 안고 산바카라을 나선 나는 꽃 잔디 안부가 궁금해서 애써 그 길을 둘러 지났는데, 마침 꽃피는 계절이라 먼발치에서 자주색 꽃이 뭉게뭉게 피어 있는 것을 보고 기뻤다. 그날 저녁 어둠이 깊이 가라앉은 밤, 새벽에 나섰던 길을 되돌아오면서 먼발치에서 꽃 잔디를 다시 찾아보았지만, 아쉽게도 찾을 수 없었다. 빛이 들지 않으니 잎의 녹색도 꽃의 자주색도 분간되지 않는다. 아침 동틀 때 보이던 자줏빛 꽃이 저녁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 경쟁 세상에서 쌓은 마음속 짐을 다 정리하지 못했던 나는, 다음 날 아침 처음 햇살과 함께 다시 피어날 꽃이 그곳에 있음을 알면서도, 보이지 않는 꽃을 애써 찾으며 한참을 서성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