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진 저녁, 낮 동안 쌓인 햇살의 열기를 식히기 위해 열어 놓은 창문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이 제법 선선해졌다. 봄을 느낄 여유도 주지 않고 찾아왔던 여름의 소란스러운 날이 지나가고 있다. 이 시간이면 습관처럼 듣는 라디오에서 오랜만에 듣는 반가운 올드팝 한 곡이 가을바람의 청량함을 입고 마음을 감싸온다. 30년은 족히 지난 곡이지만, 아직도 기억하는 이 많을 ‘Nothing's gonna change my love for you’로 알려진 Glenn Medeiros는 우연히도 나와 비슷한 연배의 가수다. 한창 활동하던 80년대 즐겨 듣고 좋아하던 미국 출신의 가수 Glenn Medeiros는 1988년에 인상적인 듀엣곡을 프랑스 출신 Elsa와 남겼는데, Un Roman D'amitie (우정 이야기)라는 곡이다.
기억하고 있는 내용이 맞는다면 청량하고도 애틋하게 시작하는 연인의 이야기가 서로 다른 언어와 감정으로 담겨 있어서 묘한 조화를 느끼게 해주는 곡이다. 처음 곡이 발표되고 34년 만에 지척에 있는 텃밭 풀벌레 소리와 어우러져 듣는 올드팝은 그 시절 여느 젊음이 그러한 것처럼 뜨겁고 거칠고 젊음이라는 화려함이 가득했던 시간의 기억을 들려주었다. 1988년과 2022년 그 사이가 찰나의 순간처럼 지났다는 현실에 돌아와서 화려한 여름이 저물었음에 잠시 어수선한 침묵이 마음속에 맴돌았다. 가을 텃밭처럼 차분한 지금의 일상이 행복하면서도, 다시 한번 뜨거운 여름을 맞이한다면 두려워 피하기만 했던 태양도 좀 더 당당히 즐겨보리라는 의미 없는 상상을 해본다.
여름은 분명히 지났다. 지나고 보니, 뜨겁고 보잘것없고, 투박하기만 해 보였던 그 시절의 화려함이 잔상처럼 기억에 떠오른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고, 가능해 보이던 그 모든 일이 무너지는 경험을 반복하던 열정 가득한 1988년을 생각해보니, 인생의 사계는 텃밭의 계절과 참 많이 닮아 있음을 느낀다. 봄 텃밭이 인생의 축제라면, 봄 작물 수확이 끝난 뒤 맞이하는 여름 텃밭은 꿈과 가능성으로 한껏 부풀어 오르는 계절이다. 저마다 큼직한 가을배추와 김장 무 수확의 꿈이 가득해진 여름 텃밭은 주위를 온통 뒤덮은 녹색의 기운이 더해지며 꿈은 이루어질 것이라는 희망 또한 가득해지곤 한다.
그렇지만 수년을 한 자리에서 작물과 함께한 경험 있는 도시농부라면 알게 되는 것이 있다. 계절은 희망하는 만큼이나 노력한 만큼의 결실을 안겨주지 않는다. 생각하지 않은 시련과 경험하지 못한 문제로 기대했던 결실은 저만치 물러가고, 그것을 천천히 인정하고 주어진 만큼의 수확에 만족하는 법을 배워가게 된다. 욕심껏 씨뿌린 김장 무는 양분이 부족해서인지 먹음직하게 크지 않는다. 여름 한 철 동안 잎으로 태양을 가득 담아야 하는데, 벼룩잎벌레가 앞길을 막는다. 애써 쫓아다니며 여름 불청객을 쫓아내도 장애물은 끝없이 나타나고, 이윽고 찬 바람 불기 시작하면 그제야 인정하게 된다. 그래, 여름은 다 지났고, 내가 희망한 수확은 이룰 수 없는 꿈이 되었구나. 희망으로 가득했던 화려한 여름은 지난 것이다.
새의 비상과 같은
우정 이야기
휴가철 해변가에서 끝나버리는
그런 사랑 얘기가 아니야
이건 우리 둘 사이에 시작되는
영원한 우정 이야기.
Un Roman D'amitie (우정 이야기)
by Elsa & Glenn Medeiros 중에서
가을로 접어드는 저녁 시간에 올드팝 한 곡이 던져준 상념은 잔잔한 파문처럼 마음에 번져간다. 지금에 와서 가사를 음미하니 34년 전 알던 가사와는 그 의미가 꽤나 달라졌는데, 가사는 그대로이니 그것을 받아들이는 내가 달라진 것이리라. 애틋하고 풋풋한 사랑 이야기라고만 생각한 곡이었는데, 지금 와서 조용히 음미해보니 훨씬 더 깊은 마음이 느껴진다. 해변가에서 만나 잠시 뜨겁고 마는 한철 로맨스이기보다는 마치 우정처럼 끝나지 않을 사랑이기를 바라는 잔잔한 간절함이 마음에 녹아든다. 1988년의 나는 몰랐지만 참 인생 경험 많은 이가 담아 둔 가사 속 보물을 30년 넘는 시간이 지나서야 발견한 기분이다. 한 줄 가사 의미를 이해하는데 참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러고 보니 처음 도시농부로 이웃과 함께 활동을 시작하던 날의 마음도 이 노래 가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경작 활동을 시작하던 첫해에는 그저 땅을 일구고 생명을 심고, 그것이 성장하는 것을 보는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해가 지나고 수확의 성과를 서로 나누면서 더 많은 수확을 원하는 스스로의 기대감이 커져갔다. 그리고 그것이 허락되지 않는 시간이 오면,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스스로 나에게 씌워 놓은 성과의 기준을 이루지 못하였음에 실망하곤 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한 줌의 수확, 손가락 마디밖에 안 되는 작은 열매가 주는 생명의 감사함만으로도 충분한 것이었다.
너무 큰 기대로 경작 활동과 수확이 꼭 이루어야 하는 목표가 되는 순간부터 작은 수확도 감사하게 나눔 하는 도시농부는 사라지고, 수확의 크기만을 이야기하는 알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리게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먹먹해진다. 잊을 뻔했던 소중한 마음을 올드팝 덕분에 제 자리에 다시 심어 놓을 수 있음에 감사해지는 순간이다. 올해 이루지 못한 것이 있다면 다음 해를 기약하면 된다. 그렇게 매해 다시 찾아올 여름에 새로운 희망과 꿈으로 채워보면 되는 일이다. 이루지 못하였음에 실망하기보다, 여름 한 철을 차곡히 채워 가을 수확의 시간을 맞이할 수 있는 시간의 선물에 감사하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경작하는 기쁨을 새롭게 텃밭을 찾는 이들에게 물려줄 날도 올 것이다. 다시 찾아올 여름을 더는 맞이하지 못하는 순간을 벌써 상상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것이 자연이 주는 아름다운 순리와 이치임을 잊지는 않으려 한다. 그런 순간이 왔을 때, 나의 여름이 온전히 가고 가을을 맞이했음을 이해하고 넉넉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나를 준비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