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남겨지다-1

by글라라

몇 해가 훌쩍 흐른 어느 변화를 알리는 봄이었다. 거리마다 새잎이 돋고 꽃망울이 터지기 시작했지만, 은정의 몸은 생기를 되찾는 계절과는 반대로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지고 있었다.

한 해만 지나면 환갑을 맞는 은정은 처음에는 갱년기를 지나며 겪는 흔한 변화라고 생각했다. 밤이면 좀처럼 깊이 잠들지 못했고, 별다른 일을 하지 않아도 온몸이 무겁고 기운이 없었다. 전에 없이 감정이 가라앉는 날도 잦았다. 창가에 앉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다가 한나절을 보내는 일도 어느덧 일상이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증상은 심해졌다. 입맛을 잃은 은정은 한 끼를 제대로 먹지 못했고, 헐거워진 옷자락이 눈에 띌 만큼 살이 빠졌다. 잠깐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숨이 차올랐지만, 은정은 나이가 들면 누구나 겪는 일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했다.

해나와 별이는 그런 은정을 그냥 지켜볼 수 없었다. 그녀들은 은정에게 여러 차례병원에 가서 건강 검진을 받아보자고 설득을 했지만 은정은 괜찮다며 걱정하지 말라는 말만 되풀이하였다. 은정의 말과 달리 두 딸의 마음속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불안이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은정은 평소와 달리 이른 아침부터 활기찬 모습으로 움직였다. 며칠 동안 손도 대지 못했던 집 안을 하나씩 정리하고, 주방에서는 희미한 콧노래까지 흘러나왔다. 식탁 위에는 가족들이 좋아하는 반찬이 차례로 놓여 있었고, 한쪽에는 갓 버무린 김치가 가지런히 담겨 있었다.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며 웃는 은정의 얼굴에는 오랜만에 생기가 돌았던 어느 전날. 다행으로 생각하는 한길에게는 날씨가 좋으니 이불을 빨아 달라고 부탁하고, 자신은 옷장 앞에 앉아 한길의 옷을 계절별로 정리하고 있었다. 오래 입어 해진 옷은 따로 골라내고, 자주 입는 옷은 손이 닿기 쉬운 자리에 놓았다. 마치 자신이 없어도 한길이 불편하지 않도록 미리 살펴 두는 사람처럼 정성스러운 손길이었다.

한길은 무리하지 말라며 몇 번이나 은정을 만류했지만, 은정은 오늘은 이상하리만큼 몸이 가볍다며 손을 멈추지 않았다. 오랜만에 가족을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쁜 듯했다.

모든 정리를 마친 은정은 말끔해진 집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한길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매일 오늘만 같으면 참 좋겠어요.”

오랜만에 활기를 되찾은 은정의 모습을 바라보며 은정의 말처럼 한길도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라며 한길이 미소를 건네자 은정도 환하게 웃어 보였다.

다음 날 아침, 은정은 평소보다 늦도록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전날 무리한 탓에 피곤한 모양이라고 생각한 한길은 깨우지 않고 혼자 아침을 먹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어느덧 정오가 가까워져도 방문이 열리지 않자, 한길은 이상한 마음에 걸려 침실로 향했다.

방 안에는 커튼 사이로 들어온 봄볕이 희미하게 번지고 있었고 창문 옆에 은정은 잠든 모습 그대로 미동도 없이 누워 있었다. 한길은 침대 곁에 앉아 은정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다. 깊이 잠든 것이라 생각하며 몇 번이나 이름을 불렀지만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불길한 예감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한길은 다급히 은정의 어깨를 두드리며 다시 이름을 불렀지만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그는 손끝에서부터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어 가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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