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란한 전화벨이 고요한 아침을 갈라놓았다.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은정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머리맡을 더듬어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잠긴 목소리로 “여보세요” 인사를 건넨 뒤 화면을 확인하자, 기억에 없는 번호가 떠 있었다. 전화기 너머에서는 여학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정은 의아해하며 잠을 깨어 다시금 확인을 하려 한다.
“누구시죠”의 물음에 은정의 성함을 묻는 여자아이는 은정에게 대뜸 자신을 모르겠느냐고 되물어 본다. 그 순간 은정의 잠기운이 단숨에 달아났다. 짧은 한 마디였을 뿐인데 오래전 기억 속에 묻어 두었던 목소리가 희미하게 되살아났다. 가슴 한가운데가 철렁 내려앉고 등 뒤로 서늘한 기운이 번졌다. 은정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혹시 수정이니?” 하는 물음과 함께 손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은정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전화기 너머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희미한 숨소리만이 두 사람 사이에 쌓인 오랜 세월을 대신하고 있었다.
잠시 후, 여자는 자신이 수정이라고 밝히며 짧은 인사를 건넸다. 은정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한동안 잘 지내고 있을 거라 믿었던 이름이 귓가에 선명하게 맴돌았다. 멈추었 던 시간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것처럼 가슴이 거세게 뛰었다. 반가움인지 두려움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들었고, 은정은 굳은 얼굴로 전화기만 움켜쥐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잘 지냈느냐고 물어야 할지, 자신의 연락처를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어야 할 지조차 판단이 서지 않았다. 수많은 말이 뒤엉킨 채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마치 폭탄에 연결된 전선 앞에 선 것처럼, 어느 말부터 꺼내도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은정은 현수가 아이를 잘 키워 줄 것이라 믿었다. 당시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기에, 아이를 위해서는 자신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떠나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수정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돌아온 것은 그리움도, 반가움도 아니었다. 수정의 목소리에는 감추려 하지 않는 원망과 차가운 적대감이 서려 있었다. 수정은 마치 은정이 살아 있는지만 확인하려는 사람처럼 형식적인 안부만 남겼다. 은정이 미처 한마디도 꺼내기 전에 전화는 일방적으로 끊어졌다. 통화가 끝난 뒤에도 은정은 한동안 전화기를 귀에서 떼지 못했다. 무심하게 이어지는 통화 종료음이 오래전 자신이 두고 떠나온 시간까지 가차 없이 끊어 내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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