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의 시간도 시간인지라 행복의 시간만큼 빠르게 지나갔다.
은정은 가끔 먼발치에서 자신의 아기를 훔쳐보며 눈물을 흘렸다. 갓난아기였던 아이가 이제는 또렷하게 걷고, 새엄마에게 안겨 노는 모습을 보며 은정은 다시는 아이 앞에 나타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은정은 마트에서 계산원으로 열심히 일했다. 많은 돈은 아니었지만 조금씩 저축도 했다. 언젠가 다시 만날 자신의 아이를 위해 돈을 아껴 쓰며 희망을 품고 살아갔다.
가까이 사는 동생 집에 들러 조카를 볼 때면 마음 한구석에서 그리움이 솟아오르곤 했다. 그래도 은정은 이 아픔을 이겨내리라고 마음먹었다.
은정은 그렇게 현수와 이혼했다. 자신의 아이를 남겨둔 채 자신만 나온 현실을 스스로 위로하면서, 서류 정리를 끝으로 현수와 완전히 남남이 되었다.
“그래. 내가 아이를 데리고 나왔으면 아기가 더 힘들었을 거야. 좋은 환경에서 자라게 하는 게 더 나을 거야.”
은정은 그렇게 자신을 달랬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은정의 동생은 언니가 지낼 수 있는 작은 방을 자신의 집 근처에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수시로 은정을 살폈다.
그 마음이 통했던 것일까. 은정은 동생의 수고스러운 관심에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으로 보답하려 했다.
어느 날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언니, 오늘은 일 끝나고 우리 집으로 와. 저녁 먹자. 남편이 오늘 교육받으러 간다고 해서 나 혼자 있어. 삼겹살 구워 먹자.” 하며, 은정은 못 이기는 척 알겠다는 대답을 남기고 채소와 음료수를 준비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통화를 끝낸 은정은 동생의 관심이 때로는 미안하면서도 고마웠다.
한편 해나와 별이는 이제 떨어져 지내지 않고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서로에게 의지가 되었고 위로가 되어주었다.
별이보다 두 살 많은 해나는 동생과 함께 먹는 저녁 시간을 좋아했다. 반찬이 다양하지 않아도 계란프라이를 부쳐 별이를 불러 함께 먹는 저녁식사였지만 그 시간만큼은 행복했다. 해나에게 그 시간만큼은 어두운 동굴에서 잠시 빠져나와 밝은 숲 속에 있는 듯한 시간이었다.
해나는 자신이 겪은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아니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그때 겪었던 일들은 누구에게 말을 해야 하는지 어린 해나는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촌 오빠가 아빠를 걱정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했던 말이 자꾸만 떠올라서였을까. 자신이 입을 다물고 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그날의 기억도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며 어린 해나는 어두운 동굴에 담아두기로 했던 것이다.
그래서 어린 해나는 자신이 겪은 일이 큰 상처였음을 모른 체, 아무렇지 않은 아이처럼 지내려고 애썼다. 가슴이 답답해질 때도 웃었고, 누군가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으면 고개부터 저었다.
그런 해나에게 2층에 사는 젊은 아주머니의 관심은 고맙게 느껴졌다. 아주머니는 가끔 반찬이나 간식을 나눠주며 다정하게 말을 걸어 주었고 그러다 조금씩 심부름을 부탁하기도 시작했다.
해나는 자신을 챙겨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호의처럼 보이는 관심에도 다른 의도가 숨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아직 알지 못했다.
어른의 보호를 받으며 자라야 할 나이였지만, 해나와 별이의 곁에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려주고 안전하게 지켜줄 어른이 없었다.
어느 날 2층 아주머니가 해나를 불렀다.
“해나야, 뭐 하니? 다른 게 아니라, 첫째를 데리고 병원에 다녀와야 하는데 둘째를 잠깐 돌봐줄 수 있을까 해서.”
“제가요?”
“응. 아기는 자고 있어. 지금 잠들었으니까 쉽게 깨지는 않을 거야.”
해나는 할 수 없다는 대답을 하기도 전에 그녀는 빠르게 집을 나섰다.
그날 이후 2층 젊은 아주머니가 해나에게 아기를 맡기는 일은 점점 잦아졌다. 그럴 때마다 아주머니는 수고했다며 해나의 손에 과자나 사탕 같은 간식을 잔뜩 쥐여주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기가 평소보다 일찍 잠에서 깨어 울기 시작했다. 해나는 아이를 달래 보려 했지만 울음은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던 해나는 전에 아주머니가 사용하는 모습을 본 포대기를 꺼냈다.
몇 번이나 서툴게 고쳐 맨 끝에 아기를 등에 업은 해나는 2층 아주머니가 돌아오는지 살펴보기 위해 집 밖으로 나왔다. 아기를 업은 채 골목 입구를 바라보며 아주머니를 기다렸지만, 아이의 울음은 쉽게 멎지 않았다.
그 찰나 동생 집으로 가던 은정은 계속 아기를 달래는 해나의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몇 발짝 지나가던 은정은 걸음을 멈추고 다시 돌아 해나에게 다가갔다.
“얘야, 동생이 많이 우는 것 같은데 무슨 일 있니?”은정은 아기를 업은 해나에게 다가가 물어보았다.
“제 동생은 아니고요. 2층 아주머니 아기예요. 아주머니가 잠깐 외출하셔서 제가 돌보고 있어요.”
“그럼 동생은 아니구나. 2층 아주머니는 어디 가셨는데?”
“첫째와 외출하셨어요. 그런데 그 사이에 아기가 잠에서 깨서 밖으로 나왔어요.” 아기를 포대기에 업은 어린 해나를 바라보던 은정은 알 수 없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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