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는 온라인 게임인, 밤에는 바순을 부는 사람의 이야기
오케스트라 공연에 가면 무대 뒤편 목관악기 줄에 우뚝 솟은 붉은 기둥이 하나 있다. 로켓 발사대 같기도 하고 공장 굴뚝 같기도 한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꼭 한 번씩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묻는다. "저건 뭐야?"
그 기둥이 내 악기, 바순이다.
나는 낮에는 회사에 다니고, 밤에는 온라인 게임인 오케스트라에서 바순을 분다. 멜로디를 맡는 일은 드물고, 객석에서는 잘 보이지도 않는 자리다. 그런데도 나는 이 악기가 참 좋다. 오늘은 그 이유를 조금 길게 적어 보려 한다.
바순은 독일에서는 파곳(Fagott), 이탈리아에서는 파고토(Fagotto)라고 부른다. '묶음'이라는 뜻이다. 16세기의 조상 악기 둘시안(Dulcian)은 통나무 하나에 관 두 개를 뚫어 U자로 이은 투박한 악기였는데, 그 모양이 장작더미를 묶어 놓은 것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족보부터 장작이라니, 처음 알았을 때 웃음이 났다. 그 장작 묶음이 몇백 년 동안 관이 나뉘고, 키가 붙고, 음역이 넓어지면서 지금의 모습이 됐다. 오늘날 오케스트라에서 듣는 바순 소리는 19세기 독일의 헤켈(Heckel) 가문이 완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내가 부는 것도 이 독일식 바순이다. 프랑스식 바순도 있는데, 비음이 살짝 섞인 매력적인 소리를 내지만 다루기가 까다로워 지금은 보기 어렵다.
바순은 목관악기 중에서 덩치가 가장 크다. 조립하면 134cm쯤 되는데, 접힌 관을 펴면 2.5m가 넘는다. 웬만한 농구 선수보다 크다. 그래서 늘 다섯 조각으로 분해해서 들고 다닌다.
부트, 테너, 롱, 벨 순서로 끼우고, 마지막으로 S자 금속관인 보컬에 리드를 꽂는다. 나무 관끼리 맞물리며 '달그락' 소리가 나는데, 연주 전 이 소리를 들을 때가 나는 제일 설렌다. 무대에 오르기 직전, 나만 아는 작은 의식 같은 시간이다.
누군가는 내 악기 가방을 보고 바주카포를 들고 다니느냐고 묻는다. 틀린 말은 아니다.
다섯 조각이 각각 어떻게 생겼는지는 블로그에 사진으로 하나씩 정리해 두었다. 바순 이야기 1편 보러 가기
바순 소리는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 음역에 따라 성격이 완전히 바뀐다.
낮은 음에서는 굵고 거칠면서도 풍성하다. 오케스트라 바닥을 받치는 베이스가 된다. 가운데 음은 가장 따뜻하다. 첼로보다는 부드럽고 호른보다는 결이 느껴지는, 인자한 할아버지 같은 소리다. 높은 음으로 올라가면 쥐어짜듯 애절해지거나, 반대로 아주 익살스러워진다.
그래서 작곡가들은 바순을 두 얼굴로 썼다. 모차르트와 하이든은 짧게 끊어 부는 '뿡, 뿡' 소리로 뒤뚱거리는 캐릭터를 그렸고, 차이콥스키와 라흐마니노프는 높은 음역에 가장 처연한 멜로디를 맡겼다. 바순 솔로가 시작되면 콘서트홀 공기가 차분히 가라앉는 게 느껴진다.
신사이면서 광대. 내가 이 악기를 소개할 때 늘 붙이는 말이다.
객석에서는 우아하게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바순 자리에서는 꽤 치열한 싸움이 벌어진다.
먼저 왼손 엄지. 바순은 유난히 엄지에 기대는 악기라, 왼손 엄지 하나로 다뤄야 하는 키가 아홉 개가 넘는다. 빠른 악구가 나오면 내 엄지는 거의 탭댄스를 춘다.
다음은 리드. 갈대 두 장을 겹친 더블 리드는 날씨와 습도에 엄청나게 예민해서, 비 오는 날과 맑은 날 소리가 다르다. 그래서 많은 연주자가 직접 칼을 들고 리드를 깎는다. 나는 아직 그 경지가 못 돼서 레슨 선생님이 만들어 주신 리드를 쓴다. 리드를 깎는 것도 하나의 기술이다.
그리고 무게. 3~4kg쯤 되는 악기를 몇 시간씩 들고 있으면 목과 어깨가 먼저 신호를 보낸다. 그래서 바순 연주자들은 의자에 가죽끈(시트 스트랩)을 깔고 앉아 그 끝에 악기를 건다. 내 몸이 아니라 의자와 엉덩이의 마찰력으로 악기를 버티는 셈이다. 처음 이 장비를 봤을 때는 웃었는데, 지금은 이게 없으면 연주를 못 한다.
연습도 만만치 않다. 바순을 배우는 사람은 누구나 바이센본(Weissenborn) 교본을 끼고 산다. 앞부분은 "할 만한데?" 싶다가 뒤로 갈수록 한숨이 늘어난다. 음이 높아지면 테너 클레프라는 기호가 나타나는데, 분명 '도' 자리에 있는 음표를 다른 음으로 읽어야 한다. 그 순간 머리가 멈춘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테너 클레프가 나오면 악보에 계이름을 적어 둔다.
바이센본 교본, 테너 클레프, 시트 스트랩과 바순 거치대 이야기는 블로그 2편에 더 자세히 적었다. 바순 이야기 2편 보러 가기
바순은 목관 파트 맨 뒷줄, 오보에 바로 뒤에 앉는다. 악기가 길어서 앞에 앉으면 뒷사람 시야를 가리고, 벨이 위를 향해 있어서 뒤에 있어도 소리가 잘 퍼지기 때문이다. 지휘자 쪽에서 보면 오른쪽 뒤편. 그 자리가 나와 바순이 묵묵히 저음을 깔아 주는 곳이다.
뒷줄이라 좋은 점도 있다. 오케스트라 전체가 한눈에 보인다.
지난가을 정기공연에서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을 했다. 제일 좋아하는 작곡가의 곡이었는데, 3악장을 하다가 정말 숨이 넘어가는 줄 알았다. 그래도 공연이 끝나고 악기를 분해하며 들은 그 '달그락' 소리는 유난히 좋았다.
처음 듣는 분께는 두 곡을 권한다.
빌 더글라스(Bill Douglas)의 〈Hymn〉. 한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바순 곡 중 하나다. 방송 배경음악으로 자주 쓰여서 제목은 몰라도 멜로디를 들으면 "아, 이거!" 하게 된다. 화려한 기교 없이 덤덤하게 이어지는 선율이 지친 마음을 위로한다. 불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몽글해지는, 나의 최애곡이다.
프란츠 단지(Franz Danzi)의 바순 협주곡 F장조. 바순을 배우는 사람이라면 한 번은 거쳐 가는 교과서 같은 곡이다. 〈Hymn〉이 서정이라면 이 곡은 경쾌함이다.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손가락을 듣고 있으면 바순이 이렇게 날렵한 악기였나 싶을 것이다. 예비 신부와 드라이브할 때 자주 트는 곡이기도 하다.
바순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바이올린처럼 멜로디를 이끌지도, 트럼펫처럼 팡파르를 울리지도 않는다. 무겁고, 리드는 까다롭고, 손가락은 아프다.
그래도 첼로와 함께 바닥을 받쳐 줄 때 온몸으로 전해지는 묵직한 진동이 있다. 다른 목관악기들이 멜로디를 부를 때 그 소리가 날카롭지 않게 감싸 주는 품이 있다. 그리고 가끔 찾아오는 솔로에서, 투박하지만 진심이 담긴 목소리가 있다.
튀지 않지만 전체를 풍성하게 만드는 힘. 그게 바순의 매력이고, 내가 닮고 싶은 모습이기도 하다.
가끔 내 소리를 듣고 '방귀대장 뿡뿡이' 같다고 놀리는 사람도 있다. 괜찮다. 그 뿡뿡이 소리가 빠지면 오케스트라의 화음이 완성되지 않는다는 걸 나는 아니까.
다음에 오케스트라 공연에 가게 된다면, 무대 뒤편에서 누구보다 바쁘게 손가락을 움직이는 붉은 기둥에 잠깐 눈길을 줘 보시면 좋겠다.
이 글은 네이버 블로그 '클래식을 소개해요'에 연재한 바순 이야기를 에세이로 다시 쓴 것입니다. 악기 구조와 브랜드, 연습 장비 이야기는 원문에 사진 수십 장과 함께 더 자세히 적어 두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