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 기행 닫힌 철길과 열린 바다
로마가 길을 만들고, 칭기즈칸이 초원으로 그 길을 연결했다면, 러시아는 철도로 그 길을 완성했다.
그리고 그 철길은 마침내 태평양을 만난다.
유라시아를 가로지르는 긴 철길의 동쪽 끝.
반대로 생각하면, 태평양에서 유라시아가 다시 시작되는 곳, 그곳이 바로 블라디보스토크다.
'동방을 지배하라(Vladivostok)'라는 이름을 가진 이 도시는 러시아 극동의 관문이자, 유라시아 대륙과 태평양이 만나는 접점이다.
러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진 나라지만 겨울이면 바다가 얼어붙는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제국이 바다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사계절 내내 얼지 않는 부동항이 반드시 필요했다.
19세기 중엽, 러시아는 연해주를 확보하며 태평양을 향한 전진기지로 블라디보스토크를 건설했다. 군항이자 상업항, 그리고 태평양으로 향하는 창이었다.
이곳에서 러시아는 대륙국가를 넘어 해양국가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한국인에게도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1860년대부터 가난과 기근을 피해 수많은 조선인들이 두만강을 건너 연해주로 이주했다.
그들은 신한촌을 이루었고, 나라를 잃은 뒤에는 독립운동의 거점이 되었다.
한 손에는 붓을, 다른 손에는 총을 들고 독립을 위해 싸웠던 수많은 이름 없는 사람들이 이 땅을 지켰다.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의 항구이면서 동시에 우리 민족 독립운동의 또 다른 고향이기도 하다.
연해주(沿海州)는 러시아 극동 연방관구에 속한 주이며 주도는 한국인들에게도 잘 알려진 항구도시 블라디보스토크다. '바다와 접해 있는 주'라는 이름처럼 동해를 끼고 있으며, 한반도 및 중국 동북 지역(만주)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리적 요충지다.
우리 민족에게는 발해의 영토이자, 구한말 이주민(고려인)의 터전이자, 일제강점기 항일 독립운동의 핵심 거점으로서 역사적 의미가 매우 깊은 곳이다.
나의 조상은 통일신라를 이룬 경주 김씨지만 고구려를 잃어버린 통일에 한탄스럽다.
통일신라이후 우리 역사가들도 발해역사를 오래토록 잊어먹었다.
그리고 고려시대는 옛 고구려 영토회복을 위해 노력했었다. 그러나 현재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 수록된 것에는 일제가 축소시킨 기록을 바탕으로 한 면도 있지않나 싶어 아쉽게 보여진다.
그 땅덩이 넓은 중국조차 지금 자기땅의 역사는 자기것이라며 동북, 서북공정을 서슴치 않는다. 그렇게 남들은 못 넓혀 야단인데 어찌 우리는 아직도 마땅히 자신의 것인 부분조차 당당하게 외치지 않는가?
블라디보스토크역은 시베리아 횡단열차(TSR)의 서쪽 종점이자 동쪽 기점인 '0킬로미터' 지석이 서 있는 곳이다. 모스크바까지 9,288km를 달리는 이 거대한 철길의 로망을 품고 수많은 여행자가 이곳을 찾는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 도시는 씁쓸한 모순의 공간이다.
육로로 곧장 이어질 수 있는 북녘의 땅이 굳게 닫혀 있기에, 우리는 유독 이 열차를 타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러시아로 날아와야 한다. 혹은 동해시에서 페리호를 타고 갈 수는 있으나 육로는 여전히 차단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 선조들은 부산에서 열차를 타고 서울을 거쳐 만주와 시베리아를 통과해 파리까지 닿았건만, 정작 해방과 분단을 겪은 오늘날의 우리는 남북이 가로막혀 반쪽짜리 섬나라처럼 살아가고 있다.
블라디보스토크역 플랫폼에 선 채로, 나는 남북 철도가 이어져 부산역에서 출발한 열차가 이 철길을 부드럽게 타고 모스크바와 파리로 향할 그날을 참으로 간절히 소망해 보았다.
'언젠가 통일이 되면 부산에서 파리까지 기차를 타고 가야지.'
오랫동안 품어 왔던 꿈이었다.
하지만 그날을 마냥 기다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2016년, 나는 조금 먼저 그 길을 달려 보기로 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올랐다.
기차는 끝없는 숲과 초원을 지나 나흘 밤낮을 달렸다. 신기하게도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창밖 풍경은 끝없이 이어졌고, 객실에서는 먹고 마시고 수다를 떨고, 낮잠을 자고, 다시 창밖을 바라보는 시간이 반복되었다. 정차역마다 내려 캐비아와 말린 생선, 절인 생선을 사 먹는 재미도 쏠쏠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길을 따라 만주와 시베리아를 오가던 우리 선조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이 끝없는 대륙을 바라보았을까.
희망이었을까.
그리움이었을까.
아니면 다시 돌아올 조국을 꿈꾸고 있었을까.
저녁 무렵 블라디보스토크 항구에는 붉은 노을이 번지고 있었다.
러시아 사람들은 해변에서 수영을 즐기고 있었고, 항구에는 크고 작은 배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철길은 이곳에서 끝났지만, 바다는 다시 세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오늘날 블라디보스토크는 북극해 항로의 동쪽 관문으로 떠오르고 있다.
기후 변화와 함께 북극 바닷길이 열리면서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새로운 해상 실크로드의 중심지가 되고 있다.
언젠가는 한반도종단철도(TKR)가 시베리아횡단철도(TSR)와 연결되고, 다시 유럽까지 하나의 철길로 이어질 날도 올 것이다. 그날이 오면 블라디보스토크는 더 이상 유라시아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될 것이다.
철길은 여기서 멈췄지만 길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바다가 그 길을 이어받고 있었다.
유라시아는 육지와 바다가 따로 존재하는 문명이 아니었다.
길은 철도가 되고,
철도는 항구가 되고,
항구는 다시 바다가 되어 또 다른 대륙으로 이어졌다.
언젠가 부산역에서 기차를 타고 이곳을 지나 모스크바와 파리까지 달릴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꿈꾸며,
나의 여행을 이어갈 것이다.
다음화: 극동의 바다를 떠난 여정은 이제 중국으로 향한다. 태평양의 끝에서 다시 문명의 또 다른 중심, 상하이가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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