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의 눈으로 역사를 다시 읽는 바카라들
이 장은 여호수아서부터 말라기까지 이어지는 '예언서'라는 큰 묶음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알려 주는 안내문입니다.
저자들은 우리가 '예언'이라는 말에 기대하는 두 가지 익숙한 생각, 곧 예언은 미래를 알아맞히는 일이라는 생각과 예언은 슬롯 정의를 외치는 일이라는 생각을 내려놓자고 말합니다.
저자들이 보기에 예언서가 '예언적'인 까닭은 몇몇 뛰어난 인물이 등장해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겪은 모든 역사와 세상의 힘겨루기를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는 사실에 비추어 처음부터 다시 읽어 내는 힘이 그 바카라들 전체에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장은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 부분은 여호수아서, 사사기, 사무엘서, 열왕기로 이루어진 '전기 예언서'를 다룹니다(룻기가 없음).
저자들은 이 바카라들을 현대적인 의미의 역사 기록이 아니라 예루살렘 멸망이라는 비극 앞에서 신앙 공동체가 남긴 신학적 증언으로 읽자고 제안합니다.
두 번째 부분은 이사야서, 예레미야서, 에스겔서, 열두 소예언서로 이루어진 '후기 예언서'를 다룹니다.
여기서는 예언자 개인의 인물됨보다 바카라이 최종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다듬어졌는지에 주목하자고 말합니다.
두 묶음 모두가 공통으로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종점이 아니며, 그 너머에는 사람이 스스로는 상상할 수 없던 새로운 미래에 대한 약속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역사서와 달리 예언서를 읽는 것이 쉽지 않듯이 예언서에 대한 저자들의 설명도 다소 난해합니다.
여러 학자들의 견해가 등장하기 때문인데, 지금 설명드린 큰 흐름을 잊지 않고 읽으시면 예언서를 읽을 때 새로운 관점을 장착하실 수 있을 겁니다.
토라 다음 자리에 놓인 두 번째 정경
저자들은 먼저 유대교 성경 안에서 예언서가 어디에 놓여 있는지를 짚습니다.
유대교에서 가장 기본이 되고 최종 기준이 되는 경전은 토라, 곧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의 모세오경입니다. 나머지 바카라들도 공동체의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그 권위는 토라보다 한 단계 아래에 있습니다.
히브리 성경은 토라가 아닌 나머지 바카라들을 관례적으로 '예언서'와 '성문서'로 나눕니다.
저자들은 이 구분을 따르겠다고 하면서도, 이것이 전승의 역사에서 꽤 나중에 생긴 구분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영국 학자 존 바튼의 주장을 소개합니다. 오랫동안 온전한 의미의 '성경'은 토라 하나뿐이었고, 나머지 거룩한 바카라들은 종류와 상관없이 모두 '토라보다 한 단계 아래'라는 점에서 같은 범주였다는 주장입니다.
저자들은 이 역사적 판단이 설득력 있다고 인정합니다.
그래도 우리가 결국 마주해야 하는 것은 지금 우리 손에 들린 성경의 최종 모습이라고 말합니다.
오랜 전승 과정을 거치면서 예언서는 제법 질서 있고 균형 잡힌 모습으로 다듬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토라와 예언서는 어떻게 다를까요?
저자들의 설명을 쉽게 풀면 이렇습니다.
토라는 하나님의 다스림에 걸맞은 믿음과 순종이 무엇인지를 이야기와 계명으로 밝혀 둔 바카라입니다.
예언서는 그 믿음과 순종이 거칠고 어지러운 실제 역사 한복판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바카라입니다.
토라가 하나님이 주신 선물과 요구를 기준으로 제시한다면, 예언서는 그 기준에 맞추어 이스라엘의 역사와 세계의 역사를 다시 읽어 내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의 순서는 '토라, 그다음 예언서'이지만, 학자들이 실제로 바카라이 형성된 과정을 따져 보면 사정이 훨씬 복잡합니다.
전기 예언서는 신명기의 신학적 관점을 물려받았을 가능성이 높으니 토라의 영향을 받은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후기 예언서는 다릅니다. 기원전 8세기와 7세기 예언자들의 선포는 토라가 지금의 최종 형태를 갖추기 전에 이미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훗날 토라에 담긴 신앙이 가장 먼저 말로 표현된 곳은 오히려 예언자들의 입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이 입장은 19세기 독일 학자 벨하우젠 이후 역사비평 학계를 붙잡아 온 핵심 생각입니다(다만 한글 번역판 이후 출간된 원서의 개정판은 이 합의가 이론 없이 유지된 것은 아니라는 단서를 덧붙이고 있어서, 오늘날에는 이 문제가 확정된 결론이 아니라 여전히 논쟁 중인 주제라는 점을 기억해 두시면 좋겠습니다).
순서야 어찌 되었든 저자들이 강조하는 점은 분명합니다.
예언서는 토라와 전혀 다른 상황에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쓰였지만, 토라와 나란히 같은 역할을 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한글 번역본은 이 대목을 예언서가 하나님께서 질서를 주신 세계를 '상상하고, 표현하고, 재현하려 한다'라고 옮겼습니다.
여기서 '상상'이라는 말은 조심해서 읽어야 합니다. 우리말에서 '상상'은 흔히 '실제로는 없는 것을 머릿속으로 지어낸다'는 뜻으로 들리기 때문에, 자칫 예언서가 꾸며낸 이야기라는 말처럼 오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상이란 말은 눈앞의 현실이 전부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세상의 모습을 또렷하게 그려 보여 준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재현'으로 옮겨진 말은 그 세계를 듣는 이의 마음속에 불러일으켜 실제로 느끼고 반응하게 만든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결국 예언서는 창조주이시며 언약의 주님이신 하나님께서 질서를 세우시고, 그 하나님께 응답하며 살아가는 세상을 그려 보여 주고, 말로 풀어내고, 독자의 마음에 불러일으키려는 바카라이라고 이해하시면 정확합니다.
'예언'은 미래를 맞히는 일이 아닙니다
유대교 정경에서 '전기 예언서'는 여호수아서, 사사기, 사무엘서, 열왕기 네 권입니다. 사무엘서와 열왕기를 상·하로 나누어 세면 여섯 권이 됩니다.
우리 성경에서 사사기 바로 뒤에 나오는 룻기가 유대교 성경에서는 한참 뒤쪽의 '성문서'에 들어가 있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흔히 '역사서'라고 부르는 이 바카라들을 유대교는 왜 '예언서'라고 불렀을까요?
저자들은 이 질문이 '예언적'이라는 말의 뜻을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든다고 말합니다.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그리고 일반 대중의 생각 속에서 예언은 보통 앞날을 미리 알려 주는 일로 이해됩니다.
원서 개정판은 이런 생각을 따르면 예언자가 마치 고대 이스라엘판 노스트라다무스처럼 되어 버린다고 꼬집습니다. 이넌 해석에서는 자연스럽게 "구약의 예언은 예수님에 대한 예고"라는 방향으로 이어집니다.
반대로 진보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예언을 슬롯 정의를 위한 뜨거운 헌신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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