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구두를 버리지 못하는 이유

아홉 켤레와 한 켤레 구두 이야기

by김원진

언젠가부터 유행에 둔감해졌다. 정확히는, 유행보다 편안함을 좇게 되었다. 옷도 몸에 붙는 것보다 늘어난 뱃살을 너그러이 품어주는 쪽이 좋고, 신발도 낡았을지언정 내 발 모양에 길든 것에 자꾸 손이 간다. 새 구두를 두고도 출근할 때마다 헌 구두를 신는 건 소박해서가 아니라, 그저 그것이 나를 편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구두 한 켤레에 내 삶이 고스란히 얹힌다. 어디를 걸었고 어디에 닿았는지, 어떤 길을 자주 오갔고 걸음 버릇이 어떻게 굳었는지—주름과, 닳은 굽과, 말라붙은 흙이 내 지난날을 대신 적어둔 일기장 같다.


어느 아침, 늘 신던 그 구두를 내려다보다 문득 빈센트 반 고흐의 〈구두〉가 떠올랐다. 고흐가 이 그림을 위해 시장에서 막일꾼이 신었을 법한 헌 구두를 사다가, 한동안 직접 신고 흙길을 걸은 뒤에야 정물로 앉혀 그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사실이든 아니든, 그 그림에 누군가의 고단한 하루를 담고 싶었던 마음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래서인지 내 구두와 그 그림이 어딘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가까운 곳에 고흐의 원화전이 열려 주말에 다녀왔다. 이백 점 가까이 걸렸는데 아쉽게도 〈구두〉는 없었다. 나는 예술성이 높은 작품보다 내가 포갤 이야기가 있는 작품에 더 끌린다. 내 지난날을 떠올리게 하고 내일을 그려보게 하는 그림 앞에 오래 서있곤 한다. 관람 후, 집에 돌아와 고흐 관련 바카라을 펼쳐 인쇄된 〈구두〉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그 그림에 비하면 내 구두는 생존의 고단함을 담았다기보다, 한결 평안하고 점잖게 포장된 쪽이었다. 제 고뿔이 남의 큰 병보다 아픈 법이라지만, 아무래도 내 하루는 막일꾼의 그것보다 덜 거칠고 더 여유로웠을 것이다.


젊은 시절, 조금 비싼 걸 먹거나 살 때면 친구들끼리 "이 쁘띠 부르주아야!" 하고 놀리곤 했다. 부자 근처에도 못 가는 처지에 뭐가 그리 양심에 찔렸던지. 어쩌면 나는 정직한 가난이라는 울타리 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그 가난을 훈장 삼아 위안해 온 것은 아닐까. 아등바등 삶을 건사하면서도, 정작 그 성실함을 '청빈'이라는 이름으로 그럴듯하게 포장하면서 말이다.


윤흥길의 소설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에서 주인공은 궁핍한 살림에도 반듯하게 닦은 구두들로 마지막 위신을 지키려 한다. 끝내 생활고에 떠밀려 죄를 짓고 달아나며 그가 남긴 것은, 정성껏 손질된 아홉 켤레의 구두였다. 고흐의 구두가 삶을 숨김없이 드러낸다면, 그 사내의 구두는 삶을 가리려 안간힘을 쓴다. 정직한 흔적과 안쓰러운 치장. 구두 한 켤레를 두고 이렇게 먼 두 자리가 있다.


내 구두는 그 사이 어디쯤 놓여 있을까. 고흐의 그림처럼 제 흔적을 솔직히 내보이고 있을지, 아니면 그 사내의 구두처럼 번듯한 겉면 뒤로 나를 감추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굽이 한쪽으로 기울고 군데군데 가죽이 벗겨진 이 한 켤레가, 오늘 아침에도 내 발에 가장 먼저 맞는다. 나는 늘 그랬듯 신던 걸 신고서, 문을 나섰다.

Schoenen_-_s0011V1962_-_Van_Gogh_Museum.jpgSchoenen_-_s0011V1962_-_Van_Gogh_Museum / 반 고흐의 [구두]

이 글은 사물 하나를 오래 들여다보며 '낡아가는 나'를 적는 산문 연재 《닦아도 중고지만, 매일이 새것 같아서》의 한 편입니다. 화요일과 금요일에 한 편씩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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