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를 살리는 일은 늘 무언가를 걷어내는 일이었
봄은 나를 들뜨게 한다. 사계를 겪어 온 몸의 습관인지, 봄볕을 쬐면 자꾸 무언가를 시작하고 싶어 좀이 쑤신다. 미루어둔 집 꾸미기도, 화단 정리도 다 그 들뜸의 산물이다. 그중 가장 오래 마음을 끈 것이 옥상 텃밭에 푸성귀를 길러 보자는 결심이었다. 황토와 상토를 섞어 씨를 뿌리고 물만 주면, 봄부터 가을까지 소일거리로 넉넉하다. 다만 한번 일을 벌이면 눈높이를 지나치게 올려 잡는 성미라, 내 일은 늘 취미와 일의 경계를 넘나든다.
한 개에 만 오천 원이나 하는 붉은 사각 통을 네 개 사 들고 옥상에 올랐다. 빈 통 넷을 나란히 놓았을 뿐인데, 머릿속에서는 벌써 케일과 쌈배추와 상추를 한 소쿠리 거두고 있다. 흙은 사 둔 상토 한 포대에, 그간 옥상에 방치해 둔 화분 흙을 섞어 쓰기로 했다.
이사 오기 전에도 이 옥상엔 작은 텃밭이 있었던 모양이다. 큼직한 원형 화분 여남은 개가 늘어서 있고, 아무도 돌보지 않았는데도 돌나물과 부추가 씨를 남겨 간간이 돋아 있었다. 그 화분 흙을 쓸 예정이라서, 안된 일이지만 이 터줏대감들은 곧 잡초로 전락할 참이었다. '잡초'라는 말은 참 상대적이다. 기르는 사람에게 쓸모 있는 것은 이름을 얻고, 그렇지 않은 것은 뭉뚱그려 잡초가 된다. 두 해 넘게 제힘으로 버텨 온 것들이, 내 필요 하나로 이름을 잃고 뿌리째 걸러질 예정이었다.
봄꽃까지 질박하게 피워 낸 것들에게 미안했지만, 눈을 질끈 감고 화분을 뒤엎었다. 그런데 잡초 몇 포기 걷어 내고 흙만 섞으면 되리라던 예상이, 뒤집힌 화분에서 딸려 나온 것 앞에서 그만 멈췄다. 쏟아진 것은 흙이 아니라, 화분 모양 그대로 얽히고설킨 거대한 뿌리덩어리였다. 흙은 그 안에 가려 보이지도 않았다.
누구의 손길도 없이 해를 나고 다시 일어서기를 거듭하는 사이, 이들은 한 줌 양분을 두고 소리 없이 다투었을 것이다. 분을 넓혀 주거나 갈아 줄 이를 더는 기다리지 않고, 좁은 통 안에서 저희끼리 얽혀 버티는 법을 익혔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도 모르게 삽을 내려놓고 잠시 주저앉았다. 그러나 고민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결국 나는 다시 삽을 들어, 얽힌 뿌리를 찢고 그 안에 숨은 흙을 털어냈다. 내가 무언가를 심으려면, 여기 버텨 온 것들을 걷어 내는 수밖에 없었다.
몸을 씻고 들어와 앉으니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저 화분을 정리했을 뿐인데. 아마도 '내 것을 들이려 남의 자리를 없앴다'는 옅은 죄바카라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크게 부풀릴 일은 아니라고, 나는 나를 애써 다독였다. 무언가를 살리는 일은 늘 무언가를 걷어 내는 일이기도 하다. 보리차 한 잔을 마시는 일조차 실은 수많은 보리를 거두어 낸 끝에 있으니 말이다. 결국 살아 있는 것치고 다른 것의 자리를 빌리지 않는 존재는 없다. 다만 그 사실 앞에서 잠시 멈칫하는 마음, 그 옅은 미안함까지 버리지는 말자고 생각했을 뿐이다.
말끔해진 통 네 개가 나란히 봄볕을 받는다. 며칠 뒤면 여기 상추 모종이 들어설 것이다. 그 곁에는, 뿌리째 뽑혀 나온 잡초가 검은 포대 하나에 담겨 입을 묶인 채 놓여 있다. 나는 그 포대를 한참 바라보다, 새 흙을 마저 채워 넣었다.
이 글은 사물 하나를 오래 들여다보며 '낡아가는 나'를 적는 산문 연재 《닦아도 중고지만, 매일이 새것 같아서》의 한 편입니다. 화요일과 금요일에 한 편씩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