萬世에 전하노니

- <조선의 기록과 문화, 만세에 전하노니>를 관람하고

byeduist 이길재

짧은 장마가 지난 후 폭음의 기세가 매섭다. 이른 아침임에도 시원하지 않고 간간히 부는 바람에도 더위가 묻어나고 습도도 높았다. 하지만, 경쾌한 음악을 들으며 운전하는 기분은 상쾌했다. 일요일이라 도로는 한산하고 파란 하늘과 가로수의 짙은 녹음이 드리워진 거리는 한여름의 정취로 가득했다. 부산문화회관에 주차하고 주차장과 이어진 산바카라로를 따라 부산박물관으로 향했다. 부지런한 어르신들은 나무그늘 아래서 담소를 나누거나 아침운동을 하시고 계셨다. 문화회관 앞마당의 잔디는 햇빛에 반짝이고 아름드리나무들은 짙은 녹음을 품어내며 나름의 방식으로 여름을 이겨내고 있었다.

아직 박물관 오픈까지 30분이 남았다. 아침부터 서둘러 박물관에 온 이유는 부산에서 개최되는 제4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개최 기념으로 부산박물관과 국립고궁박물관이 공동 기획한 ‘조선의 기록과 문화, 만세(萬世)에 전하노니’를 관람하기 위해서였다. 참고로 전시회는 2026. 7. 7.(화)부터 8. 30(일)까지 전시한다. 특히, 세계문화유산인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의궤 등 기록유산과 조선 왕실의 여러 상징물을 한자리에서 관람할 수 있는 기회가 흔치 않아 개관일만 손꼽아 기다렸다.


드디어 9시! 오픈과 동시에 입장하니 관람객은 오직 나 한 사람, 어느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천천히 관람할 수 있어 황제 관람의 주인공 된 기분이었다.

조선은 어떤 나라인가? 고려의 신진사대부들이 성리학적 이념을 바탕으로 일으킨 역성혁명으로 탄생된 나라이다. 조선을 가리켜 ‘기록의 나라’라고 하는데 조선은 국왕의 언행, 조정의 논의, 지방 관청의 업무 보고 등에 이르기까지 모든 국정 과정을 치밀하게 문자로 남겼다. 사실 삼국시대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는 전란으로 인한 왕국의 패망으로 제대로 그 기록이 충분하지 않다. 대개 고고학적 유적과 유물에 의존하거나 중국의 사료를 통해 국가 시스템을 유추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었다. 이와 달리 조선은 기록을 온전히 후대에 전하기 위해 엄격한 교정과 체계적인 관리 체계를 마련하는 데 힘을 썼고, 그 덕분에 조선의 역사를 입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전시관 입구에 들어서자 조선의 종묘가 세 개의 영상 화면으로 어둠 속에서 서서히 드러난다. 조선의 종묘는 국가의 정체성이자 통치의 근간을 상징하는 가장 성스러운 공간이다. 유교 국가였던 조선에서 사직(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곳)과 함께 ‘종묘사직(宗廟社稷)’이라는 말로 국가 그 자체를 대변한다. 전시의 시작은 가상의 종묘를 거쳐 회랑을 지나 제1주제 기록의 나라, 조선으로 시작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은 태조부터 철종까지 472년간의 역사를 연월일 순으로 기록한 총 1,893권 888 바카라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역사기록이다. 정치, 군사, 경제, 슬롯, 문화 전반을 아우르는 내용을 담고 있어 조선의 역사를 종합적으로 보여주며, 역사 기술에 있어 진실성과 신빙성이 높은 기록으로 평가받는다. 조정은 사관에게 독립적 신분과 사실 그대로 기록하는 권한을 보장함으로써 기록의 신빙성을 높였다. 특히, 완성된 실록은 화재나 전쟁 등으로 인한 훼손에 대비하여 전국의 여러 사고에 나누어 보관되었다.


7년간 이어진 임진왜란으로 전국토가 유린될 때 조선왕조실록의 사고(史庫)도 전란을 피해 갈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은 전란 중에도 소실을 면하고 온전히 전승된 전주사고본이 있어 이를 바탕으로 재인출할 수 있었고, 이를 여러 곳으로 나누어 보관하였다. 하지만, 이후에도 화재, 일제강점기 때 국외반출, 한국전쟁 시기에 북한으로 반출 등의 수난을 겪으며 현재 남한에는 서울대 규장각과 국가기록원 등에 수천 권의 실록이 분산 보관되어 있으며, 이번 전시를 통해 그 귀한 원본의 일부를 직접 마주할 수 있었다.


국왕이 승하하면 춘추관의 주관 아래 실록 제작을 위한 임시 관청인 실록청이 설립되고 실록청에 선발된 관원들은 재질, 학문, 식견의 세 가지 소양인 삼장을 모두 갖춘 최고의 인재였다. 우선 각 방에서 사초를 비롯한 각종 자료(시정기, 관청일기)를 모아 초초(初草)를 작성하고 이를 도청에서 추가, 삭제, 수정해 중초(中草)를 작성한다. 이를 총재관과 도청 당상이 중초를 교정보아 정초(正草)를 작성한다. 두 번의 시험 인쇄와 교정, 교열을 거친 후 완성본을 인쇄하고 완성된 실록은 보자기에 싸서 상자에 넣은 뒤 춘추관 및 지방 외사고에 분산 봉안한다. 마지막으로 초초와 중초의 글씨는 물에 씻어내고 종이는 조지서(造紙署)로 보내는 데 이를 세초(洗草)라고 한다.


너무나 완벽해 보이는 조선왕조실록이다 보니 다른 왕들의 실록과는 달리 특별한 과정을 거친 것이 오히려 눈길이 갔고, 그것으로 인해 실록의 제작과정이 오히려 더 이해가 되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건 광해군일기 중초본과 정초본, 그리고 오대산사고 봉안 중종실록의 교정쇄본이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7년간의 전쟁으로 폐허가 된 조선의 어려운 재정상태를 반영하였는지 광해군일기의 중초본은 다른 실록이 초서로 쓰인 중초본은 물에 씻어 버리지 않고 이 바카라은 그대로 태백사고에 봉안되었다. 그러다 보니 본문 곳곳에 붉은 먹과 검은 먹으로 글을 삭제하거나 수정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실록 편찬 과정의 생생한 흔적을 보여준다. 또한, 광해군일기의 정초본은 당시 극심한 재정난과 북방의 불안한 정세로 인해 다른 실록과는 달리 인쇄된 형태가 아닌 대부분 붓으로 직접 쓴 필사본으로 제작되어서 조선왕조실록의 또 다른 애환을 보여준다. 또한 오대산사고 봉안 중종실록의 교정쇄본은 임란 이후 선조 39년에 재인쇄를 마친 후 인쇄된 실록을 직접 수정하였던 흔적이 생생하게 남아 있어 당시의 편찬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본래 제작 원칙상 교정쇄본은 파기해야 하였으나 그 정성과 노력이 아까워 별도로 수습해 오대에 봉안함으로써 후학들에게 조선왕조실록의 제작 과정을 더 실감 나게 안내해 주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이외에도 국왕의 비서 기관이 작성한 국정 수행 일지인 승정원일기, 국왕의 국정운영을 기록한 일기린 일성록 등의 기록물을 보면 조선이라는 나라가 국정을 운영함에 있어 대단히 시스템적으로 운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왕실과 국가 행사의 기록을 담은 의궤는 국가 의식과 행사의 전 과정을 글과 그림으로 기록함으로써 후대에도 시행착오 없이 재현될 수 있도록 실용적인 지침을 제공하고자 한 조선의 체계적인 기록 문화를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제2주제는 조선 왕실의 상징과 품격이다. 조선의 국왕은 여러 상징물을 통해 생전과 사후의 권위와 위상을 드러냈다. 의례용 도장인 어보와 공덕을 칭송하는 글을 새긴 어바카라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국왕의 모습을 그린 어진은 진전에 봉안되어 왕실의 정통성을 상징하였다. 국왕의 자리 뒤에 펼쳐진 일월오봉도는 최고 통치자의 존재를 나타내었다. 의례용 물품뿐만 아니라 왕실 가족의 일상에 사용된 복식과 장신구, 가구, 도자기, 보자기 등은 조선 왕실의 우아하고 기품 있는 아름다움을 보여 주었다.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있을까만은 태조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제작된 금보와 영조가 정조에게 내리는 효손 은인이 기억에 남는다. 1872년은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임신년으로부터 여덟 번째 회갑(팔회갑)이 돌아온 해였다. 고종은 이를 기념해 태조는 '응천조통광훈영명(應天肇統廣勳永命)'이라는 존호를 추가해서 올렸다. 영조가 정조에게 내린 은인의 인면에는 영조가 친필로 쓴 '효손팔십삼서(孝孫八十三書)'이 새겨져 있었다. 정조의 사도세자에 대한 효성이 만세토록 전해지기를 바라는 마음과 후계자에 대한 믿음이 담겨 있다고 한다.

전시관에는 3점의 어진을 전시하고 있었다. 영조가 51세 때의 모습을 그린 어진, 영조가 연잉군 시절 때의 초상화, 그리고 철종의 어진이다. 안타깝게도 영조의 연잉군 시절의 초상화와 철종의 어진은 1954년 부산 화재 때 극적으로 구조되었으나 불에 탄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다행스럽게 연잉군 시절의 초상화는 얼굴 부분은 비교적 잘 남아 있었으나 철종의 경우 오른쪽 절반이 불에 타서 얼굴의 왼쪽 반과 왼쪽 몸만 남아 있었다. 문화재 관리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느끼는 순간이다. 한 번 소실되면 절대 되돌릴 수 없는 귀중한 문화유산임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그 외에도 규모만으로도 보는 이를 압도하는 동궐도, 영친왕비가 입었던 붉은 원삼, 궁중에서 사용한 제기, 궁중도자기, 명성황후를 왕비로 바카라봉한다는 교명, 명헌태후의 71세 생신 축하 잔치를 그린 병풍과 의궤 등 평소에 접하기 힘든 문화유산을 일목요연하게 전시하고 있었다. 또한, 최근 영화 <왕과 사는 남자>로 세간의 화제와 함께 조선 역사에 대한 관심을 높였던 단종과 정순왕후 신주의 종묘 봉안을 기록한 의궤와 옥바카라 등도 전시하고 있었다.

조선 왕실의 품격을 보여주는 유물들에 이어, 이번 전시의 개최지인 부산의 장소성을 보여주는 대일 외교 관련 기록물 전시로 이어졌다.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고립의 길을 걸었고 대외관계조차 명분과 신의를 바탕으로 한 성리학적 윤리로 접근하였다. 그럼에도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일본과의 국교를 재개하며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국왕의 공식 외교 사절단인 조선통신사를 파견하였다. 당시 대일 외교의 거점이었던 동래부와 조선통신사와 관련된 유물도 이번 전시를 통해 한자리에서 관람할 수 있었다.


모든 관람을 마치고 출구로 나오니, 전시관 입구 벽면에 적힌 태조의 발원문이 생각나서 다시 입구에 가서 읽어보았다.


".... 부처님의 은밀하신 보살핌과 말씀이 구름처럼 온 세상에 널리 퍼져, 살아있는 모든 존재들이 함께 깨어나고 나라를 복되게 하고 백성들이 풍요로워지기를 바란다. 이 땅에서 전쟁이 영원히 그치고 평화로운 세상이 되니 만세가 되도록 영원히 이 공덕에 힘입을 것이다. 이것이 과인의 간절한 염원이다."
- 조선 국왕 이성계가 발문을 쓰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풍요롭고 평화로운 세상이 만세까지 영원하기를 기원하는 바람이 글자 한 자, 한 자에 정성껏 새겨져 있었다. 개국 이후 500여 년을 이어온 조선은 비록 그 명운을 다해 일제에 의해 식민지가 되는 아픔을 겪었지만 굳건히 이겨내어 광복을 이루어 대한민국으로 발전하였다. 현재 조선의 그 찬란했던 기록의 문화와 조선 왕실의 품격 등은 오늘날 한류(K-컬처)로 전 세계로 펴져나가고 있다. 일찍이 김구선생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는 것이 문화의 힘'이라고 하였다. 그는 부유함과 강력함은 나를 지킬 정도면 충분하나 진짜 인류를 감동시키고 평화를 가져오는 것은 문화라고 보았다. 김구선생의 이 선언은 80여 년이 지난 오늘날 문화 강국 대한민국으로 실현되고 있다.


전시관 밖으로 나오니 무더위에도 관람객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특히, 부모님과 함께 박물관을 찾은 어린 학생들이 많았다. 우리나라의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배우는 것은 나의 뿌리와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또한, 역사를 통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더 나은 선택은 없는지'를 스스로 질문함으로써 더 정의롭고 지혜로운 슬롯를 만들 수 있는 성숙한 시민들이 늘어난다는 의미이다. 높은 문화 강국의 힘으로 남에게 행복을 주는 나라는 바로 지금 역사를 배우고자 하는 어린이들의 발걸음에서 시작되고 있다.


<참고>

<<조선의 기록과 문화, 만세에 전하노니>> 2026 전시도록 <조선의 기록과 문화, 만세에 전하노니>

<조선의 기록과 문화, 만세에 전하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