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운드시소 한남
여름 소리를 들으며 Part2 시작합니다.
작품을 그릴 때 이야기를 만들기보다
낯선 공간에서 마주치는 특별한 순간을 기다린다.
와~ 레퍼런스가 이미 완성된 작품 같아 보입니다.
역시 작품은 보는 눈이 먼저라는 생각도 드네요~
예쁜 걸 알아채는 작가의 눈이 대단해 보입니다.
키워드가 적힌 표지를 열어 이곳에서만
만날 수 있는 작가의 이야기를 찾아보세요.
이야기를 찾는 법
여행을 다니며 가상의 인물을 눈앞에 떠올리고 그가 낯선 여행지를 자유롭게 돌아다니게 합니다. 조용히 그를 따라다니며 적절한 공간에 인물이 멈추어 섰을 때 그곳의 풍경을 사진에 담습니다. 그리고 돌아와 그것을 그림으로 옮깁니다.
이처럼 작품을 그릴 때 이야기를 만들기보다 낯선 공간에서 마주치는 특별한 순간을 기다립니다. 저 스스로 '바로 이곳이야'라고 느끼는 지점이 가장 중요합니다. 확실히 무엇이라 표현할 수는 없지만, 마치 보물 찾기를 하듯 수많은 풍경 속에서 그에 부합하는 순간을 발견하고는 합니다. 그런 풍경은 그 자체로서 이미 풍부한 텍스트를 지녔기에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기보다 풍경 속에 이미 존재하는 이야기를 저만의 방식으로 전달합니다.
영향을 준 예술가
저의 롤모델은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입니다. 하루키만 읽는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하루키만 읽습니다. 하루키의 모든 바카라을 소장하고 있으며 소설과 에세이를 가리지 않고 읽습니다.
바카라장의 바카라을 모두 읽고 나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합니다. 읽을 때마다 늘 새로운 기분이 듭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온 습관 같은 것입니다. 하루키는 삶의 대부분을 에세이로 쓰고 자신의 의견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중심을 잡기가 점점 어려워지는데 이는 분명 대단한 일입니다. 그는 작품을 통해 자기 생각을 더욱 단단하게 피력해 나가며 자신의 세계를 구축했습니다. 하루키는 스스로 하드보일드 소설을 쓴다고 말하지만 저는 그의 글 이면에 존재하는 유쾌한 부분을 더 좋아합니다.
마라톤을 하며 저녁에 먹을 무즙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저도 그처럼 엉뚱한 상상을 하며 유쾌한 에너지를 나누고 싶습니다. 조금은 서툴지 모르지만 그처럼 진실한 이야기를 전하는 예술가가 되고 싶습니다.
아티스트가 되기까지
저는 굉장히 내성적인 아이였습니다. 유치원 선생님은 매일 우는 저를 걱정하셨는지 부모님께 진지하게 태권도를 권하셨습니다. 태권도 학원에 가서도 첫날부터 울었습니다. 너무 울어서 머리가 아파 상담실에서 쉬고 있었는데 관장님께서 타이 레놀을 한 알 주신 것이 기억납니다. 그런 제가 유일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이 그림 그리기였습니다. 딱히 잘 그리는 것도 아니었 지만 가만히 앉아 무언가를 그리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그것이 습관이 되었고, 초등학교에 입학해서도 교과서며 공바카라이며 흰 여백만 보이면 무엇이든 그렸습니다. 그러자 아이들이 하나둘 다가와 구경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대화 가 이어졌고, 친구가 하나둘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어느새 저는 교실에서 '그림 그리는 애'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여전히 저는 내성적이고 말수도 적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림으로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이 저에게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사람마다 기질이 다르고 자신만의 표현 방식이 있기 마련이니까요.
아티스트라는 제법 거창한 이름표를 달아주셨지만 이것은 제가 세상과 대화하는 방식일 뿐입니다.
작품 스타일
애니메이션 과에 진학 후 적성과 맞지 않아 어려움을 느꼈습니다. 저에게 그림은 순간을 포착하는 것에 의미가 있었기에, 무언가 움직이게 만드는 과정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졌습니다. 한 장면에 집중하고 싶었던 저는 애니메이팅 중심의 수업에 부담을 느껴 결국 학교에 잘 나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해나가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 가던 중 오래된 올림푸스 필름 카메라를 발견했습니다. 필름과 배터리를 사서 카메라를 작동시킨 뒤, 베란다에서 자고 있던 고양이를 향해 셔터를 눌렀습니다. '된다!' 밖으로 나가 동네를 찍고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하늘 위로 안개처럼 퍼져 있는 구름, 옥상에서 찍은 동네의 전경, 도로 위를 지나는 수많은 자동차, 골목길의 화분 등. 현상된 사진은 그동안 휴대폰으로 찍은 사진과 전혀 달랐고, 마치 수많은 입자로 이루어진 따뜻한 덩어리처럼 느껴졌습니다. 내심 만족스러웠습니다. 제가 갈망하던 '순간의 포착'과 '한 장면에 대한 집중'의 가능성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애니메이션적인 요소와 사진을 결합하면 무언가 새로운 것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영감을 얻는 법
저는 별다른 취미가 없어서 시간이 날 때면 가만히 앉아 잡생각을 많이 합니다. 대개는 어제 꾼 꿈을 다시 생각해 보거나 하는 식입니다. 잠에서 자주 깨는 편이라 깰 때마다 잊기 전에 꿈의 내용을 휴대폰 메모장에 빠르게 적어 둡니다. 그러나 나중에 다시 읽어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이 대부분이고 꿈속의 이미지조차 떠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적어 둔 글들은 현실에서 상상하기 힘든 생각이나 관점을 제공합니다. 왜 이런 꿈을 꾸었을까? 생각을 이어 나가다 보면 조금씩 실마리가 풀리 기도 하고 완전히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그 과정에서 낙서를 더해 그림에 대한 영감을 얻기도 합니다.
여름
'성장'은 제 작업 전체를 관통하는 주된 주제이고 '여름'은 성장의 이미지를 가장 잘 표현하는 계절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에게 성장은 지극히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과정입니다.
봄이나 가을이 주는 온화함과 달리 성장은 여름의 뜨거운 햇볕이나 시끄러운 매미 소리처럼 피할 수 없는 강렬한 감각으로 느껴집니다. 십 대 시절의 갈등이나 성장통은 열사병에 걸린 듯 뜨겁고 어지러웠습니다. 이런 이유로 저는 여름이 성장을 가장 잘 표현하는 계절이라고 생각합니다.
소년과 소녀
십 대 후반, 저는 과연 어떤 어른이 될지 궁금했습니다.
그 무렵 누구나 그렇듯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불안했습니다. 여름 햇빛은 저를 집어삼킬 듯 뜨거웠고, 도시의 소음은 하나의 거대한 생명이 내는 소리가 되어 저를 짓눌렀습니다. '어른'이라는 단어만 떠올려도 속이 울렁거렸습니다. 하지만 그런 저에게도 가끔 기분이 나아지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파란 하늘 어딘가에서 아득하게 들려오는 비행기 소리를 들을 때, 먹먹하면서도 아스라하게 사라지는 그 소리는 답답한 마음을 고요히 가르고 지나가고는 했습니다. 어쩌면 저는 그 시절 해결하지 못한 고민과 갈등을 그런 풍경 속에 새겨둔 채 외면해 버렸는지도 모릅니다. 주어진 문제로부터 도망쳤기에 '어떤 어른이 될까'라는 질문에서 여전히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셈입니다. 이것이 제 그림에 유독 십 대가 많이 등장하는 이유입니다. 그들은 성장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저의 모습이자 누군가의 모습일 것입니다. 이제는 문제를 직시하며 그림을 통해 과거의 저를 현재의 삶에서 마주 해보려 합니다.
좋은 예술가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받고는 합니다. 매일 거의 같은 시간에 일어나 일하고 비슷한 시간에 잠드는 사람들을 존경합니다. 규칙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단단한 긍정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술가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어떤 틀 안에 넣고 매일 꾸준히 작업 을 해 나가는 것. 그런 꾸준함 속에서 비로소 밀도 있는 무언가가 만들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쌓아 올린 결과물은 분명 사람들에게 단단하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전달할 것입니다.
재료와 기법
수작업을 좋아합니다. 물감이 물을 통해 종이 위에 번지고 스며드는 우연한 효과에 매력을 느낍니다. 단색 물감이라도 물의 농도에 따라 다채로운 톤으로 용해되어 착색되었을 때, 그 속에서 무한한 픽셀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지금까지는 재료의 특성을 살릴 수 있는 종이를 주된 매체로 사용했지만, 최근에는 조금 더 단단한 화면을 만들고자 캔버스 작업도 하고 있습니다. 캔버스가 물감을 대하는 방식이 종이와는 전혀 다르 기에 종이에서의 효과를 어떻게 캔버스에서 구현할 수 있을지 다양한 실험을 하고 있습니다.
관심 있는 주제
이미 사라졌거나 사라질 공간에 강한 끌림을 느낍니다. 이런 공간은 지나온 세월만큼이나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오랜 시간 자리를 지켜온 공간의 흔적들을 따라가다 보면 내면에서 무언가가 피어오릅니다. 시간을 견뎌낸 모습에 숙연해지기도 하고, 얼룩진 정적 속에서 고요함과 평온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한때 누군가의 삶의 공간이었음을 기록하고 싶습니다. 삶이란 서로를 기억하고 보살피는 것이 전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기억'을 주요 소재로 사용하는 이유는 저를 지탱해 준 작지만 단단한 것들을 소중히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작고 단단한 고마움을 그림으로 남겨 누군가에게 작은 희망을 전하고 싶습니다.
작품이 완성되기 전, 성률의 생각과 기록을 모았습니다.
작가의 진솔한 이야기가 담긴 인터뷰와 드로잉을 통해 성률이 바라보는 세상에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갑니다.
우리의 하루하루는 구름처럼 매 순간 다른 빛깔과 모양으로 채워지며 흐릅니다. 아주 느린 속도일지라도 우리는 매일 조금씩 어제보다 단단한 존재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잊을 때면 하늘을 올려다보세요. 머리 위를 지나가는 구름처럼, 우리도 멈추지 않고 저마다의 내일을 향해 흘러가는 중이니까요.
원풍경
'상어 놀이'를 아시는지? 동네에 따라서는 '용암 놀이'라고 부르는 곳도 있는데 규칙은 간단하다. 땅에는 배고픈 상어가 살거나 펄펄 끓는 용암이 흐르고 있기 때문에 발이 땅에 닿으면 죽는 것이다. 한 번은 교실에서 이 놀이를 하다가 미끄러운 바카라상과 부드러운 양말이 만나 머리통이 깨진 아이도 있었다.
그 아이는 아마 누구보다 상상력이 풍부했으리라. 정말로 바닥에 상어가 있다고 믿고 필사적으로 도망쳤으니까. 나는 혼자 있을 때도 곧잘 이 놀이를 즐겼다.
목표는 하고 시간에 땅을 밟지 않고 집까지 가는 것. 창문을 넘고 화단을 건너 담장을 타고 올라가 양팔을 벌린 채 몸의 균형에 집중하며 천천히 걷는다.
당시에는 가방에 교과서와 바카라을 잔뜩 넣어 다녔기 때문에 무게로 인해 난이도가 상당했다. 땅을 밟지 않는다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땅을 밟아야만 하는 막다른 길을 맞닥뜨리면 주변의 사물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돌다리나 뗏목을 만들어 스스로 길을 개척해야만 한다. 담장 위를 걸을 때면 평소와 다른 높이에서 세상을 내려다볼 수 있어 즐거웠다. 내심 땅바닥을 걷는 사람들이 나를 동경의 눈빛으로 올려다보는 것만 같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저 한심해 보였겠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나는 담장 위 거대한 구름 아래 나만의 길을 개척해 나갔다.
구름 5
처음 대만에 방문했을 때 가장 먼저 타이난으로 향했다. 복잡한 도심보다는 한적한 마을 같은 장소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타이난은 도심이지만 역 주변을 제외하면 그다지 복잡하지 않다. 다만 버스나 지하철 같은 대중교통수단이 거의 없어서 이곳 사람들은 대부분 스쿠터를 타고 다닌다. 나는 국제면허증이 없어 스쿠터를 빌릴 수 없었지만 다행히 대만에도 서울의 따릉이 같은 공공 자전거 'Ubike'가 잘 운영되고 있었다. 도착한 날은 저녁이라 일찍 잠에 들었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자전거를 타러 갔다.
처음에는 사용법이 어려워서 헤맸는데 어찌어찌 빌릴 수 있었다. 타이난에는 자전거 도로가 없고 인도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스쿠터 전용 도로에서 현지인들과 함께 달려야 했다. 옆으로 쌩쌩 지나가는 스쿠터가 처음엔 무서웠는데 나처럼 스쿠터 틈에서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을 몇 번 마주치고 긴장감이 다소 풀렸다. 7월의 타이난은 아침부터 절절 끓었다. 현지인들이 이렇게 더운 날씨에도 다들 긴팔 셔츠나 재킷을 입고 다니는 것을 보고 남국의 사람들은 더위에 강하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숙소로 돌아왔을 때 팔이 벌겋게 익은 걸 보고 다 이유가 있었음을 알게 됐다. 처음에는 구글 맵을 보며 근처의 유적지나 공원에 찾아가려 했다. 그러나 도로 한복판에서 스쿠터에 둘러싸인 나는 유유자적하게 지도를 볼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서 목적지 없이 그냥 달리기로 했다. 지도의 압박에서 벗어나니 해방감이 느껴졌다. 스쿠터들과 함께 도로를 질주하며 점점 더 속도를 높였다. 정오로 갈수록 햇살은 점점 더 뜨겁게 쏟아졌고 일 년 내내 낙엽이 지지 않는 검푸른 나무 사이로 햇빛이 동그라미를 그리며 떨어져 내렸다.
그렇게 점멸하는 빛 속을 빠르게 통과하며 저 멀리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를 향해 더 빠르게 페달을 밟았다.
갈매기들, 2026, 캔버스에 아크릴, 130x19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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