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로랑생 회고전: 무지개 위의 춤-Part1

@마이아트뮤지엄

by상상만두




나를 열광시키는 것은 오직 그림밖에 없으며,
따라서 그림만이 영원토록 나를 괴롭히는 진정한 가치이다.

- 마리가 마르셀 주앙도한테 쓴 편지-





마리 로랑생 Marie Laurencin

1883. 10. 31 - 1956. 6. 8


1890년 7세 즈음


1885년 어머니 폴린


0세(1883)

10월 31일, 파리의 샤프로 거리

63번지에서 태어남.


18 - 20세(1901~03)

화가가 되기를 희망했으나, 어머니의 뜻이었던 여자 고등 사범학교 진학 준비를 그만두고 국립 세브르 도자기 공장에서 도자기 회화(자기 채색) 수업을 듣기 시작함. 이후 파리 시립학교에서 데생(소묘) 수업을 받음.



21세(1904)

사립 앙베르 화실에서 본격적으로 회화를 공부하기 시작함.

같은 화실에서 공부하던 조르주 브라크와 알게 됨.


1905년 22세 즈음, 앵베르 아카데미에서 (안쪽에 서있는 사람이 마리)


23세(1906)

처음으로 앙데팡당 전 (살롱 데 앙데팡당)에 출품함.



24세(1907)

파블로 피카소의 소개로 기욤 아폴리네르를 만나 연인이 됨.

피카소와 아폴리네르를 비롯한 젊은 예술가들의 아지트였던 공동 아틀리에

'바토 라부아르(세탁선)'에 출입하게 됨. 그들로부터 많은 자극을 받으며,

특히 입체파와 앙리 루소의 영향에 기울어짐.



27세(1910)

이 무렵부터 입체파 특유의 어두운 색조보다 회색, 장밋빛, 파랑, 초록 등을 많이 사용하게 됨.



28세(1911)

로슈의 소개로 의상 디자이너 폴 포아레의 여동생 니콜 그루를 알게 되어, 평생의 절친이 됨.

아폴리네르가 모나리자 도난 사건의 용의자로 체포됨 (이후 무혐의로 석방).



29세(1912)

폴 포아레가 소유한 바르바쟁주 화랑에서 첫 개인전(실제로는 로베르 들로네와의 2인 전)을 개최함.

판화가 장 에밀 라부뢰르를 알게 되어 판화 지도를 받음.

아폴리네르와의 연애 관계가 끝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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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30세, 아폴리네르와 노르망디의 여행에서


30세(1913)

5월 11일, 어머니 폴린 사망.

큰 충격을 받음.

가을, 로슈의 소개로 독일인 오토 폰 베첼은 알게 됨.

미국에서 개최된 **아모리쇼 (Armory Show)**에 작품 7점이 전시됨.



31세(1914)

6월 22일, 폰 베첸과 결혼하여 독일 국적이 됨. 신혼여행 중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프랑스의 적국 국민이 되었기 때문에 중립국 스페인으로 망명하여 종전까지 체류함. 초기에는 마드리드에 머물며 세실리아 데 마들렌 후작부인 등을 중심으로 상류층과 교류를 깊게 함.


1915-16년, 친구들과 함께한 마리


32세(1915)

봄에 말라가로 이동함. 생활이 무너진 남편이 알코올 의존 증세를 보이기 시작함.

현지를 방문한 니콜 그루와의 친분이 더욱 깊어짐.



33세(1916)

바르셀로나로 이동함. 다다 화가 프랑시스 피카비아 부부와 재회함.

3월, 포병 장교로 복무 중이던 아폴리네르가 중상을 입음.

가을, 아폴리네르가 자전적 소설

**<살해된 시인〉 **을 발표함.



34세(1917)

가을, 전후의 생활 형편이 악화되는 가운데 남편과 함께 독일로 향함.



35-36세(1918~19)

파리에 남아 있던 전 재산이 적국 재산으로 간주되어 당국에 의해 몰수됨. 마드리드로 돌아감.

11월 9일, 아폴리네르가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함.

11월 11일, 제1차 세계대전이 프랑스의 승리와 독일의 패배로 종결됨.


1920년, 마리 로랑생의 남편, 오토


37-38세(1920~21)

뒤셀도르프의 폰 베첸 가문에 머물며 파리로의 귀환을 목표로 파리와 독일을 오가며 생활함.

봄부터 혼자 파리에 거주함.

이혼이 성립됨.

로젠베르그 화랑에서 열린 전후 첫 개인전이 성공을 거둠.


1923년, 40세 무렵


40-42세(1923~24)

유행 화가로서 화려하게 사교계에 진출함.

발레 뤼스의 주재자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의 의뢰를 받아 발레

** 〈암사슴들> **의 의상과 무대장치를 디자인함.

1월 몬테카를로에서, 5월 파리에 〈암사슴들〉 초연. 의상과 무대장치 모두 큰 호평을 받음.

수잔 모로가 마리의 집에서 가정부로 일하기 시작함.

파리 근교 샹프로제에 별장을 구입함.



49세(1932)

라부뢰르의 초청으로, 그가 설립한

** 「파리 16구 아카데미」 **에서

3년간 강사로 활동함.



1934년 51세 무렵, 파리 16구의 아카데미에서


54세(1937)

시력이 약해져 제작 시 안경을 사용하게 됨.

오랜 공적에 의해

**레지옹 도뇌르 훈장(슈발리에)**을 수훈함.

파리 만국박람회를 위해 제작한 유화 작품이 국가에 매입됨. 같은 박람회를 위해 판화 제작도 의뢰받음




56세(1939)

9월 3일, 제2차 세계대전 발발.

나치 독일이 전위 예술을 공격하기 위해 개최한 ** 「퇴폐 미술 경매」

**에 작품이 출품됨.



57세(1940)

휴전 후 파리로 돌아옴.



59세(1942)

독일에서 전 남편인 폰 뷔체가 사망 자작 시와 에세이로 자신을 이야기한 저서 「밤의 수첩』 초판이 출판됨.



60세(1943)

무용가 롤랑 프티의 발레

** 〈폴과 비르지니> **의 의상을 디자인함.



61세(1944)

사브르 드 브래자 거리의 아파트가 독일군에게 접수되어, 마슬랭 거리의 보 백작 소유의 작은 저택으로 임시 거처를 옮김.

보방 거리에서 아틀리에를 빌림.



62세(1945)

사브르 드 브래자 거리의 아파트가 독일군에게 접수되어, 마슬랭 거리의 보몽 백작 소유의 작은 저택으로 임시 거처를 옮김.




68세(1951)

전쟁 이후 계속 점거되고 있던 사브르냉 드 브래자 거리의 아파트를 되찾기 위해 소송을 제기함.

프랑스 발레단의 발레

** 〈도미니크와 도미닉〉 **의 의상을 디자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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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70세 무렵


71세(1954)

6월 2일, 센 주 민사재판소의 인가로 수잔을 양녀로 삼아 수잔 모로- 로랑생이라는 성명을 사용하게 함.



72세(1955)

재판에서 승소하여 사브르냉 드 브래자 거리의 아파트로 돌아감.



73세(1956)

6월 8일 밤, 자택 아파트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함.

생전에 준비를 진행하고 있던 「밤의 수첩』 제2판이 출판됨

형식적인 유산 분배와 수잔의 생활 보장이 끝난 뒤, 남은 재산의 대부분은 오퇴유 직업훈련 고아원과 빌팡 수녀원 자선사업단에 유증 됨.



1976년

사브르 드 브래자 거리의 아파트에서 수잔이 사망한다.


1979년

수잔으로부터 마리의 유산을 상속받았던 수잔의 친여동생 조르지나가 사망한다.

이듬해에 걸쳐, 마리에게서 물려받은 작품 등이 『수잔 모로 -로랑생의 유산」으로 경매에 출품된다. 수익은 최종 상속자인 오퇴유 직업훈련 고아원으로 귀속된다




이렇게 연대 형태로 인생을 살펴보니 인생을 간접적이지만 느껴볼 수 있다.

내 인생도 이렇게 정리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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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욤 아폴리네르

시인이자 평론가 | 마리의 영원한 연인

GUILLAUME APOLLINAIRE

1880 - 1918


로마에서 태어났으나, 프랑스로 이주한 뒤 기욤 아폴리네르로 개명하였다. 그는 막스 자곱 등과 함께 전위 시인으로 활동하며, 독창적인 방식으로 시에 깊이감을 부여했다. 시와 문화뿐만 아니라 미술 평론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마리 로랑생과의 연대감이 깊은 애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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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잔 모로

마리의 동반자, 양녀

SUZANNE MOREAU


수잔 모로는 마리 로랑생의 집에 고용되어 신뢰를 얻었으나 점차 그녀의 일상을 통제하며 외부와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럼에도 로랑생은 그녀에게 깊이 의존했다.

주변에서는 두 사람을 '나이 많은 수녀와 풋내기 수녀'에 비유하기도 했다. 1954년, 로랑생은 그녀를 양녀로 입양해 재산과 작품을 물려받을 유일한 법적 상속인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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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 폰 하우젠

독일 화가 | 마리의 전남편

OTTO VON WÄIJEN

1881 - 1942


뮌헨 출신의 구상화가로 그림을 그렸으나 이를 전업으로 삼지는 않았다. 마리 로랑생의 남편이었으며 잦은 음주와 폭력적인 성향으로 인해 그녀를 지치게 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흔들리다 결국 이혼에 이르렀지만, 서로에 대한 애정이 여전히 남아 있었던 것으로 주변인들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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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피카소

화가

PABLO PICASSO

1881 - 1973


스페인 말라가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미술 활동을 한

20세기 대표적인 큐비즘 작가다. 바토 라부아르의 중심인물로, 기욤 아폴리네르와 마리 로랑생이 연인이 되도록 연결하는 역할을 했다. 그녀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으나, 망명 시절 스페인에 머문 이후에는 그림에서 재능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해 마리를 격노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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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 그루

디자이너 | 마리의 절친

NICOLE GROULT

1887-1967


20세기 초반에 활약한 프랑스의 패션 디자이너로, 유명 디자이너 폴 포와 레(Paul Poicer)의 여동생이었다.

마리보다 다섯 살 어렸지만 '헤르마나(스페인어로 자매)' 등 다양한 애칭으로 불리며 평생의 조력자이자 친구로 남았다.

특히 망명 시기에 마리를 찾아와 큰 힘이 되었고, 지속적으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그녀에게 깊은 위로를 주는 등 가장 의지한 인물 중 한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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