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차를 벌리는 조직, 격을 바꾸는 조직

[방구석5분혁신.통찰스케치]

by뿌리혁신가이드 안병민 대표

[방구석5분혁신=안병민] 권오현 오렌지플래닛 창업재단 이사장. 삼성전자 연구원으로 입사해 삼성전자 회장까지 오른 전문경영인이다. 『초격차』, 『초격차: 리더의 질문』, 『다시, 초격차』를 통해 한국 기업이 패스트팔로어를 넘어 퍼스트무버로 전환하기 위해 필요한 경영 원칙을 제시해 왔다. 이 글은 권오현 이사장의 초격차론을 조직의 격을 바꾸는 경영의 문제로 톺아읽는다. 2008년 반도체 사업의 적자 경험에서 출발해 R&R, 실패, 인재, 사일로, 평가와 보상, AI 시대의 질문력까지 권오현 경영론의 핵심 축을 따라간다.


세계 1등 기술을 가진 사업이 적자를 냈다고?! 권오현 이사장이 ‘초격차’를 생각한 출발점이었다. 기술은 앞섰다. 구성원도 열심히 일했다. 시장에서의 위상도 높았다. 그런데 손익은 적자. 이 장면은 한 기업의 실적 문제가 아니었다. 한국 기업의 성장 방식이 더 이상 통하지 않을 수 있다는 신호였다.


한국 기업은 오랫동안 '빠른 추격자' 방식으로 성장했다. 실수를 줄였다. 낭비를 없앴다. 정답을 복제했다. 틀리지 않는 인재를 길렀다. 시키면 정확히 해내는 조직을 만들었다. 자본도 부족하고, 기술도 부족하고, 경험도 부족했던 시절, 이보다 강력한 방식은 없었다. 실패를 줄이는 것이 곧 경쟁력이었다.


이제, 시대가 달라졌다. 정답이 보이지 않는 시장이다. 따라잡는 속도만으로는 부족하다. 따라잡을 대상이 안 보여서다. 남이 만든 길을 빨리 걷는 능력보다, 남이 보지 못한 길을 먼저 찾는 능력이 필요한 이유다. '패스트팔로어(Fast Follwer)'의 핵심 역량은 '실행력'이다. 퍼'스트무버(First Mover)'의 핵심 역량은 '문제 정의'다. 실행력만으로는 새 판을 만들 수 없다. 이미 열린 판 안에서 순위를 다툴 뿐이다.


초격차의 본질이 여기에 있다. 초격차는 경쟁자보다 몇 걸음 앞서는 전략이 아니다. 경쟁의 층위를 바꾸는 전략이다. 전교 1등과 5등의 차이는 격차다. 고등학생과 대학원생의 차이는 격이다. 같은 기준 안에서 점수 차이를 벌리는 일이 아니다. 기준 자체를 달리하는 일이다. 격차를 벌리는 조직은 언젠가 따라잡힌다. 격을 바꾸는 조직은 다른 무대에 선다.


Chapter 1. 왜 1등 기술은 적자를 냈나: 초격차는 격차가 아니라 격이다


2008년은 권오현 이사장의 경영 인식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그는 당시 메모리와 비메모리를 포함한 반도체 사업 전체를 맡았다. 메모리 사업은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적자가 났다. 세계 1등 기술을 가진 사업이 적자를 냈다는 사실은 단순한 경기 변동으로 설명하기 어려웠다. 전략이 틀렸거나, 운영이 틀렸거나, 둘 다 틀렸다는 뜻이었다.


그때 던진 질문은 단순했다. 왜 세계 1등이 적자를 내는가? 열심히 일했다. 기술도 앞섰다. 그런데 왜 결과는 적자인가? 답은 경쟁의 기준에 있었다. 남보다 조금 더 잘하는 정도로는 부족했다. 경쟁자가 적자를 낼 때도 흑자를 낼 수 있어야 했다. 시장이 흔들려도 버틸 수 있는 체력, 가격이 무너져도 살아남는 기술, 수요가 흔들려도 수익을 낼 수 있는 운영 역량이 필요했다.


이 지점에서 초격차 개념이 나왔다. 남보다 조금 앞서는 일이 아니었다. 남이 따라오기 어려운 수준으로 올라서는 일이었다. 경쟁사가 고등학생이라면 나는 대학원 박사과정 수준이 돼야 한다는 인식이었다. 같은 시험지를 놓고 점수 차이를 벌리는 일이 아니다. 아예 다른 문제를 풀 수 있는 능력을 갖는 일이다.


패스트팔로어 시대에는 레퍼런스가 있었다. 앞선 기업의 제품을 분석했다. 공정을 분석했다. 전략을 분석했다. 길이 보였다. 남의 것을 뜯어보고, 자기 조건에 맞게 고치면 됐다. 빠르고 효율적인 방식이었다. 실패 확률도 낮았다. 그러나, 치명적인 한계가 있었다. 레퍼런스가 사라지는 순간 조직이 멈춘다는 것. 정답이 없는 곳에서는 복제 능력이 힘을 잃었다.


퍼스트무버는 다르다. 남을 벤치마킹해 비슷한 제도를 만드는 조직이 아니다. 룰을 직접 세팅하는 조직이다. 평가 제도, 보상 체계, 교육 방식, 의사결정 체계, 모든 게 달라져야 한다. 추격의 시대에 맞춰진 제도는 틀리지 않는 사람을 골라낸다. 지시를 정확히 수행하게 한다. 실패를 최소화한다. 그런 제도 위에서는 모범생만 나온다. 창조자는 나오기 어렵다.


권오현 이사장이 가장 먼저 손댄 것은 조직의 R&R(Role and Responsibility)이었다. 역할과 바카라임이다. 누가 결정하는가. 누가 실행하는가. 누가 바카라임지는가. 이 구분이 흐릿하면 조직은 열심히 일해도 성과를 내지 못한다. 생산량을 누가 결정하는지 불분명해진다. 투자를 누가 승인하는지 흐려진다. 실패했을 때 무엇을 기준으로 판단할지도 애매해진다. 모든 사람이 열심히 일했다고 말한다. 정작 결과에 바카라임지는 사람은 없다.


R&R은 바카라임의 선이다. 어디까지가 내 결정인지 정하는 기준이다. 어디서부터 협업이 필요한지 나누는 기준이다. 이 선이 흐려지면 리더는 모든 일을 붙잡게 된다. 구성원은 지시만 기다린다. 바카라임은 공중에 뜬다. 조직은 바빠진다. 그렇다고 빨라지지는 않는다.


다음 원칙은 위임(Delegation)과 권한부여(Empowerment)였다. 자율과 바카라임은 구호가 아니다. 구조다. 권한 없이 바카라임만 요구하면 구성원은 방어적으로 움직인다. 바카라임 없이 권한만 주면 조직은 무바카라임해진다. 퍼스트무버 조직은 권한과 바카라임을 함께 설계해야 한다. 리더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방식으로는 새 시장을 열 수 없다. 조직이 커질수록 중앙 통제는 병목이 된다. 리더의 역할은 답을 주는 것이 아니다. 답을 만들 수 있는 구조를 세우는 일이다.


그러나 구조를 바꾸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다. 권오현 이사장은 평가, 보상, 교육, 훈련 시스템이 추격 시대의 유산이라고 봤다. 새 시대에 맞게 고쳐야 한다고 여러 통로로 주장했다. 그러나 충분히 고치지 못했다. 자신이 영향력을 가진 동안에는 일종의 시행령처럼 운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시행령은 법 아래다. 법이 바뀌지 않으면 리더가 떠난 뒤 모든 게 원래 자리로 돌아간다.


이 대목이 중요하다. 변화는 리더 개인의 힘으로 시작될 수 있다. 그러나 지속되려면 제도가 돼야 한다. 시행령은 쉽게 사라진다. 헌법과 법률이 돼야 오래간다. 조직 변화도 같다. 한 명 리더의 의지로 만든 문화는 취약하다. 평가와 보상, 권한과 바카라임, 승계와 교육 안에 뿌리 내려야 한다. 그래야 격이 바뀐다.


Chapter 2. 좋은 실패를 자산으로 만드는 법: 피해액이 아니라 학습가치다


퍼스트무버는 실패를 피할 수 없다. 새로운 일을 한다는 것은 실패 확률이 높은 영역으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실패를 무조건 용인하자는 말은 위험하다. 실패를 무조건 처벌하자는 말은 더 위험하다. 중요한 것은 실패의 종류를 가르는 일이다.


'좋은 실패'는 남이 해보지 않은 일을 하다가 얻은 실패다. 결과는 나빠도, 새로운 지식이 남는다. 조직이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된다. 다음 의사결정의 자산이 된다. '나쁜 실패'는 이미 알려진 실수를 반복하는 실패다. 남의 것을 베끼면서 틀린 부분까지 베끼는 실패다.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는 실패다. 단순한 부주의로 발생한 실패다.


이 구분을 피해액으로 하면 안 된다. 손실이 10억 원이라고 반드시 나쁜 실패는 아니다. 손실이 1,000만 원이라고 가벼운 실패도 아니다. 새로운 기술을 양산에 적용하다가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생겼다면 조직은 배울 수 있다. 정비 과정에서 기본 볼트를 제대로 조이지 않아 사고가 났다면 손실 규모와 상관없이 바카라임을 물어야 한다.


예컨대, 새로운 시도 중 문제가 생겼다면, 그것은 단순 실패가 아니다. 아무도 몰랐던 사실을 조직이 알게 된 사건이다. 그런 실패를 처벌하면 구성원은 다시는 새로운 시도를 하지 않는다. 안전한 반복만 택한다. 답습이고 퇴행이다. 조직은 실패를 줄인 것이 아니라 학습을 멈춘 것이다.


좋은 실패라고, 실패 자체를 보상해서도 안 된다. 실패를 보상하면 제도가 왜곡된다. 중요한 것은 실패 뒤에 남은 생각의 흔적이다. 어떤 가설을 세웠는가. 어떤 근거로 시도했는가. 무엇을 새롭게 알게 됐는가. 결과는 실패였지만 사고의 수준이 높았다면 그 사람은 기억해야 한다. 당장 상을 줄 일은 아니다. 이후 발탁과 승진의 근거로 삼을 일이다.


여기서 도전과 무모함이 갈린다. 도전은 가설을 가진 시도다. 무모함은 근거 없는 실행이다. 좋은 실패는 가설, 실험, 학습의 구조를 갖는다. 나쁜 실패는 반복, 태만, 회피의 구조를 갖는다. 리더가 이 둘을 구분하지 못하면 조직은 두 방향으로 망가진다. 좋은 실패를 처벌하면 조직은 얼어붙는다. 나쁜 실패를 방치하면 조직은 무너진다.


네거티브 시스템(Negative System)도 같은 맥락이다. 안 되는 것을 명확히 정한다. 나머지는 모두 허용한다. 포지티브 시스템(Positive System)은 허용된 것만 하게 만든다. 추격의 시대에는 포지티브 시스템이 유효했다. 정해진 절차 안에서 낭비를 줄이고 실수를 줄이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정답이 사라진 시대에는 포지티브 시스템이 도전 자체를 막는다.


특히 규제가 강한 산업에서는 이 구분이 더 중요하다. 법과 규제는 지켜야 한다. 그러나 조직 내부까지 허가주의로 움직일 필요는 없다. 법이 금지한 영역과 조직이 습관적으로 금지한 영역은 다르다. 퍼스트무버 조직은 이 둘을 구분해야 한다. 규율은 지킨다. 불필요한 내부 장벽은 낮춘다. 그래야 새로운 시도가 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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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비즈랩] 대표|서울대 언론정보학과+HSE MBA|*저서 [마케팅 리스타트]+[경영일탈]+[그래서 캐주얼]+[숨은혁신찾기]+[사장을 위한 노자]+[주4일 혁명]+[질문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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