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면은 갱신되고, 사람은 멈췄다

by부소유

권준현 대리가 나를 자리로 불렀다. 나는 여전히 그를 형이라 불렀고 그는 개의치 않았다. 개발팀에서 넘어오는 신제품에 새 공정이 추가되는데, 그것을 내게 맡긴다는 것이다. 이름은 티타늄 공정, 줄여서 T. 전용 장비는 내가 전에 잘 만지던 타키온 장비다. 그는 업무를 주면서 배경과 설명을 붙이고, 격려와 함께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라는 말까지 했다. 그의 말에는 군더더기가 없다.


티타늄 위주의 화합물은 단단하고 전기 전도성이 좋다. 로봇의 인공신경 배선에서 신호를 잠시 저장하는 축전기로, 또 다른 물질이 섞이는 것을 막는 장벽으로 쓰인다. 과거에 담당했던 공정의 확장판이다. 그 확장판을 금성전자 양산 라인에서 최초로 다루게 되었고, 내가 주 담당자가 된다.


그러면 안 되는데, 욕심이 생겼다. 기왕 다루는 거 잘 다루고 싶다. 내겐 이것뿐이다. 3년 차에 진정한 직무를 맡았고, 팀에서 제대로 된 역할을 하는 직원이 된다. 이제 제대로 된 회사 생활의 시작이다.


신규 장비는 역시 만만치 않았다. 설치도 어려웠지만 공정 환경 설정이 쉽지 않았다. 일상 업무에 대응하며 틈틈이 개발팀의 설명서와 보고서를 연구했고, 마침내 납기에 맞춰 양산에 적용했다. 하지만 문제는 양산 중에 더 많이 터진다. 이석수 부장은 뒤늦게 T 공정으로 본부장에게 어필하려고 매일 아침 나를 불렀다. 방금 품질 하나가 튀었다는 지적. 오 분 전에 튄 것이었다.


퇴근해도 공정이 마음에 걸렸다. 한 번은 밤 열 시에 다시 출근했다. 야간 담당에게 부탁해도 되지만, 이쯤 되니 나만큼 이 공정을 이해하고 조건을 바꾸는 사람이 없었다. 나만 잘하는 업무가 생긴다는 것은 유리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게 문제였다. 이 공정은 계속 내 발목을 잡았다.


다른 팀의 연락도 잦아졌다. 렌즈지옥에서는 조건의 상호작용을 물었고, 나는 상부에서 눌러주는 조건과 측면에서 펴주는 조건으로 제품을 나눠 보내 함께 평가하자고 답했다. 생산팀에서는 진행 속도를 올려 달라 했고, 나는 세척 주기 때문에 당장은 어렵다며 여유 제품으로 평가부터 해 보겠다고 답했다. 어느새 생산부에서 신공정 하면 고철수로 통하고 있었다. 부담은 쌓였지만 썩 나쁘지 않았다. 인정받는 기분은 어느 정도의 만족을 줬다. 그 사이 연말이 왔다.


어느 아침 회의에서 이석수 부장이 문진수 과장에게 인사팀 안내를 설명하라고 시켰다. 새 인사정바카라, 이름은 순위평가. 외국 기업에서 가져왔다는 제도다. 파트원들이 서로의 순위를 매기고, 그것을 종합해 개인의 순위가 집계되고, 평가자가 인사 평가의 참고 자료로 쓴다는 것이다. 오디션 프로 시청자 투표라도 하냐고, 꼴찌 하면 탈락이냐고 장도영이 물었고, 그거 그냥 인기투표 아니냐고 탁용칠이 정곡을 찔렀다. 다면 평가라고 부르지만 그냥 인기투표다. 동료들은 서로가 무슨 일을 하는지 관심이 없다. 어느 세기에 갖다 놔도 실패했을 제도를, 회사는 새것처럼 수입해 왔다.


순위는 이석수 부장에게 취합되었고, 그가 한 명씩 불러 면담을 했다. 내 차례가 되어 회의실에 들어가자 그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식은땀을 흘리며 그가 말했다. 바로 얘기해 줄게. 너, 너가 꼴찌야. 그리고 딱히 꼴찌라서 그런 건 아니지만, 너에게 저평가를 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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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공계와 어문계를 오가며 공부했습니다. 공장에서 일하는 15년 차 엔지니어이자, 소설을 쓰는 에세이스트입니다. 읽기와 쓰기, 기술과 인간에 대한 생각을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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