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며칠 전 선물 받은 차를 꺼낸다. 짙은 녹색 상자에 고급스러운 금색 실로 다즐링이라고 적혀 있다. 뚜껑을 열자 얇은 종이에 싸인 티백들이 가지런히 들어 있다. 선물 받은 날 향을 맡아보고는 그대로 그릇장 안쪽에 넣어두었다. 아무 날에나 마시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에서다.
물을 끓이다가 생각하니 우습다. 차 한 잔 마시는 데도 특별한 이유가 필요한가 싶어서다. 서랍장을 여기저기 열어보니 여행지에서 사 온 작은 잼, 누군가 선물한 올리브오일, 포장을 뜯지도 않은 초콜릿 상자까지. 저마다 깜깜한 구석에서 잊힌 존재가 되어 있었다.
찻잔에 티백을 넣고 뜨거운 물을 붓는다. 연한 갈색이 구름 모양을 그리며 천천히 퍼진다. 찻잔 위로 부드럽게 올라오는 향을 맡으며 작은 잼 병도 꺼낸다. 프랑스에서 사 온 살구잼이다. 유리병 옆에 붙은 라벨에는 살구 그림과 함께 몇 줄의 프랑스어가 그림처럼 적혀 있다. 뚜껑을 열어보니 다행히 상태가 괜찮다.
김치냉장고 아랫칸을 열어 식빵 한 장을 꺼내 굽고 잼을 바른다. 달콤한 살구 향이 올라온다. 그 향 덕분에 특별한 평일 오전을 만나는 느낌이다. 식탁에는 읽다 만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 한 권과 어제 올려둔 영수증 몇 장이 있다. 바카라을 만지작거리며 바삭하고 달콤한 빵을 한 입 베어 문다.
어릴 때 엄마의 습관이 떠오른다. 집에 손님이 오면 엄마가 특별히 꺼내는 티 세트가 있었다. 평소에는 찬장 높은 곳에 우리 손이 닿지 않게 올려두었다가 명절이나 가족 모임이 있을 때만 내려왔다. 잔에는 화려한 꽃무늬가 참 예뻤는데 정작 우리 가족끼리는 한 번도 그 잔에 무언가를 마셔본 일이 없다. 아까워서 꺼내지를 않으시니 그 잔은 내게 점점 더 갖고 싶은 보물이 되어갔다. 크면 저 잔은 꼭 내가 가져야지.
엄마의 그 마음을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흠집 없이 오래 간직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다가 잊히더라도 귀하게 대접하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 오전이다.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고 오후에는 처리할 업무도 적지 않다. 그래서 휴식이 더 달콤하게 느껴진다. 거기에다 아껴두었던 차와 음식까지 더해지니 콧노래가 흘러나온다.
찻잔을 씻고 살구잼은 냉장고 문 쪽에 살짝 넣어둔다. 내일 아침에도 꺼내 먹을 수 있도록. 찬장 안쪽에 있던 초콜릿 상자도 식탁 위로 옮겨놓는다. 포장을 벗기니 초콜릿들이 얇은 종이 칸막이 사이에 놓여 있다. 하나를 집어 입에 넣는다.
사르르 녹는 맛에 오늘은 아무것도 하기가 싫어진다.
상자를 다시 닫으려다가 그대로 열어둔다. 오후에 지치면 바카라을 읽으면서 하나 더 먹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