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반의 장미

byAnima

그늘과 흙길이 있어 걷기 좋은 양천 둘레길을 걸으려다 미수에 그쳤다.

한 명이 참가 의사를 밝혔는데 취소를 했기 때문이다.

아니마님, 늘 수고가 많은데 내일 저 말고 참가자가 없으면 하루 쉬는 게 어때요? 날이 꽤 덥다고도 하네요.


아, 별일 있으시면 취소 댓글 다세요. 저는 오늘 밤까지 기다려보고 아무도 없으면 공지 내릴게요.

특별한 일은 없어요. 참가자가 저 혼자라서 죄송해서 그래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 1명이라도 있으면 가야지요.


그럼 내일 갈게요.

그리고 3시간 후에 일이 생겨서 못 가겠다고 문자가 왔다.

취소 댓글이 달린 것을 보고 나도 공지를 내려버렸다.

내 수고를 덜어준다고 생각해서 없는 일까지 만들어서 배려하는 마음일 수도 있다.

한 명이면 취소를 하는 다른 길잡이와는 달리 남녀불문 1명이라도 있으면 걷는 나로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매일 공지하는 내게 한 명 이건 일곱 명이건 중요하지 않다.

혼자가 아니고 같이 걷는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피곤하지도 않은데 매일 걸어 피곤할 거라는 생각은 배려가 아닌 배반이다.

왜 하필 나를 택했니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그냥 스칠 인연 한 번도 원한 적 없어

기억하렴

나의 서글픈 모습


한 번 더 배반의 장미를 선물 받은 적이 있다.

주 없이는 살아도 술 없이는 못 사는 주사랑이 내 길에 온 것은 지난가을이었다.

올 때마다 하는 말은 ‘나는 알코올중독자다’란 것과 '아니마님 길이, 거리로 보나 난이도로 보나 내게 딱 맞는 길이라 온다'는 것이었다.

매주 관악산에서 내려와 막걸리 한 잔 하다가 나도 알코올중독자 될까 걱정하기도 했는데 다행히 그 기회를 박탈당했다.


그 역시 관악산에 단둘이 가게 되자 길잡이를 배려한다고 취소를 한 것이다.

내게 빠져버릴까 공포스러워 지레 겁을 먹은 거라면 이해가 되긴 한다.

좌우지당 간에 크나큰 배려에 어긋난 약속, 관악산도 끊고 막걸리 한 잔도 끊으니 야속한 배반의 장미여!


내 주위에 약속을 밥 먹듯이 어기는 작자들은 볼 수 없었는데 길잡이를 하면서 밥 먹듯이취소를 하는 사람들을 가끔 본다.

나뿐만 아니라 길벗들의 머리에 입력되어 있는, 취소 잘하는 사람은 정해져 있다.

내일 일은 난 몰라요, 일단 댓글 달고 약속이 생기면 가차 없이 취소한다.

물론 부득이한 사정이 있으면 할 수 없다.

그런데 부득이한 사정이 왜 밥 먹듯이 생기느냐고요?


처음 시작할 때 취소하지 않는 길잡이가 되자고 다짐을 했는데 대체로 잘 지키고 있다.(아주 좋아)

한 명이 오건, 두 명이 오건(7명이 마감)

눈이 오건 비바람이 불건(태풍은 생각 좀 해보고)

전철에서 쓰러지건 목소리가 안 나오건..... 취소한 적이 없다.(이걸 자랑이라고)

이쯤에서 마음에 켕기는 일이 떠오른다.

3년 전 버스 여행을 가서 친해진 후배가 세 명 있었다.

그중에서 한 명은 나를 언니, 언니 하며 따라다녀서 더 친했다.

한 번은 친구 별장이 있는데 2박 3일로 네 명이 놀러 가자는 것이다.

흔쾌히 응했는데 떠나기 3일 전에 아무 의논도 없이 자기가 아는 친구 한 명도 같이 간다고 통보를 했다.

우리는 다 모르는 사람이고 강원도에 가는데 한 차에 5명이 타고 가는 것이 무리라 생각했다.

비좁게 차를 타고 가서 모르는 사람과 3일을 보낼 생각에 어떻게 하면 빠질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차에 때맞춰서 방광염에 걸리고 말았다.

못 가게 돼서 미안하다고 하고 안 갔다.

내게는 이런 일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 신기가 있나 의심을 해보기도 한다.


그 친구는 내가 핑계를 대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항상 그 친구가 먼저 전화를 하고 나는 수동적이었는데 그 이후로 연락이 없다.

내가 먼저 여행 잘 다녀왔느냐고 연락할 마음도 없었다.

수동적이면서도 상대방에게 끌려간다고 생각하면 줄을 놓아버리는 나에게 상처를 받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큰 부상이 아니기를, 그들과 나에게 '배반의 장미'를 선사하며 잊으려 한다.

처음부터 내겐 없었던 거야

사랑이란 작은 여유도

그래서인지 난 너무 쉽게 너의 눈빛 속에 빠진 걸

길어버린 머릴 자르고 눈물 맺힌 나를 보았어

거울 속의 나는 이제까지 꿈을 꾼 듯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