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존재만으로도 충분했던 시간

byMy Way

‘나비 효과’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비의 날갯짓 한 번이 지구 반대편에서 태풍을 일으킬 수 있다는 과학적 이론인데, 저는 이 단어를 들을 때면 한 아이의 존재 자체가 가족 안에서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를 떠올리곤 합니다.


2020년 12월 초, 제 아이는 코로나 시국이었음에도 카이스트에 면접을 보러 갔습니다. 지원했던 다른 곳들은 영상 업로드나 비대면 면접을 이미 마친 상태였기에, 대면으로 치르는 카이스트 면접이 치열했던 과학고 2년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도전이었습니다.


저희 가족은 하루 전날 대전에 모였습니다. 카이스트 가까운 곳에 숙소를 잡고 남편이 퇴근 후 합류하길 기다렸다가 다 함께 설레고 떨리는 마음으로 밤을 보냈습니다. 저희 가족은 늘 중요한 날이면 그렇게 옹기종기 모여 마음을 모아 왔기에, 아이가 면접을 보는 그 시간도 함께일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시골에 홀로 계시던 시어머님의 건강 상태가 너무 안 좋다는 연락이 온 것이었습니다.

추운 겨울밤, 어머니에 대한 걱정이 엉겨 붙은 남편의 얼굴을 보니 마음이 착잡했습니다. 아들에게도 일생일대의 중요한 면접인지라 곁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에 고민이 깊어지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숨소리가 고르지 못한 시어머님의 상태도 시간을 다투는 일인듯하여 남편의 어깨에 짊어진 무게를 나눠지기로 했습니다.


새벽 일찍, 자동차의 시동을 켜고 꽁꽁 얼어버린 차를 녹이는 동안 남편은 몇 번이고 저희가 묵고 있는 방을 올려다봤습니다. 저 역시 창가에 서서 남편을 배웅하며 찬 바람을 맞았습니다. 비록 몸은 떨어져 있어도 남편 역시 아이의 면접에 온 마음을 쏟아부어줄 것을 알기에 든든했습니다.


그날 아이는 면접을 무사히 마쳤습니다. 그리고 시어머님은 남편이 모시고 간 큰 병원에서 ‘심부전’을 진단받으셨습니다. 하마터면 큰일을 치를 뻔했던 것이었죠. 그날 이후 며칠간 시어머님은 입원 생활을 하셨습니다. 코로나로 인한 병원 방침 때문에 간병은 남편 혼자 도맡아 했지만 걱정했던 것과 달리 빠르게 회복해 일상으로 돌아가실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4개월 간격으로 병원을 방문해 평생 먹어야 하는 약을 처방받아 가시지만, 전보다 훨씬 씩씩하게 잘 지내십니다.


그런데 지난 명절, 시어머님께서 집에 오셔서 그날의 이야기를 꺼내셨습니다. 숨이 잘 안 쉬어지니, “이제, 진짜 죽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삶의 끈을 놓을 무렵, 손주의 대학 합격 소식들이 들려왔답니다. 그것도 한두 곳이 아닌 데다 ‘카이스트’ 합격 소식까지 전해 들으며 갑자기 입맛이 돌고 하루 종일 웃음이 나면서 행복해지셨답니다. 시어머님의 빠른 회복은 제 아들의 대학 합격 소식 덕분이었던 것입니다.


제 아들은 의도치 않게 할머니를 다시 살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일이 할머니에게만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제 아들이 살린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이 또한 아들은 전혀 의도치 않은 일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2년 전, 아이가 아직 8mm 콩알만 한 존재로 제 뱃속에 있을 때 동생이 암 판정을 받았습니다. 당시 여러 가지 문제들이 뒤엉켜 힘든 삶을 살고 있던 동생에게, 엎친데 덮친 격으로 큰 병까지 닥친 것이었죠. 대학 병원에서 동생의 수술 날짜를 잡던 날, 강인했던 친정 엄마께서 망연자실 무너져 내리던 그 모습이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당시 저는 아직 '엄마'가 아니었기에 그 아픔을 온전히 헤아리진 못했지만, 엄마의 가늘게 떨리던 손과 흔들리는 눈동자에 불안했습니다.


결국 동생은 치료를 위해 친정으로 올라왔고, 수술과 방사선 치료, 재발을 거치는 긴 암투병의 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지난한 시간에 제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가난한 대학원생 부부였던 저희는 '3년 내 박사학위 취득'이라는 조건부 친정살이를 하며 부득이 동생과도 함께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모가 된 동생은 암투병이라는 힘든 상황 속에서도 제 아이에게 무한한 사랑을 쏟아주었습니다.


제 아들은 겁이 많은 엄마 대신 이모의 등에 더 많이 업혀서 잤습니다. 제가 학교로 출근하고 없는 낮동안 친정 엄마를 도와 아들의 일상을 돌봐준 것도 동생이었습니다. 가끔은 저 몰래 아들에게 '자유와 일탈'을 선물하며, '난, 이모니까!'라며 당당해해 저를 기막히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제 동생은 제 아들의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섭니다. 틈틈이 용돈을 쥐어주고 선물을 안깁니다. 맛있는 것을 먹이려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엄마보다 더한 유난이다 싶은데, 거기에도 사연이 있었습니다.

가장 어둡고 힘들었던 시기, 제 아들의 존재만으로도 힘을 얻었던 것이었습니다. 옹알이하는 조카, 저지리 하는 조카, 업어 키운 조카, 힘차게 뒤뚱뒤뚱 걸어 안기는 조카, 아침마다 방문을 두드리며 “이모, 놀자”라고 말하는 조카의 환한 미소 덕에 살아내었다는 겁니다.


물론 제 아들에게는 어떠한 목적과 의도가 없었습니다. 그저 평범하게 자라주었고, 학창 시절을 열심히 보냈고, 현재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살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아이의 존재 자체와 작은 날갯짓이 그렇게 저희 가족에게는 큰 의미였습니다.


아들은 어느새 성인이 되었습니다.

과학고를 거쳐 카이스트에 진학했고, 부모의 품을 벗어나 자신만의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성장했다고 해서 가족의 이야기가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더 깊고 새로운 이야기들이 시작되었습니다.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들은, 어제보다 한 뼘 더 자란 아들과 함께 걷는 우리 가족의 기록입니다.

<박사 둘, 학사 하나>에서 시작해 <박사 둘, 석사 하나>, 그리고 <박사 셋>이 되는 그날까지의 긴 여정을 담아보려 합니다. 때로는 웃기고, 때로는 뭉클한 우리 가족의 동행기, 그 첫 번째 시리즈인 <박사 둘, 학사 하나>의 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드디어, 새로운 연재로 돌아왔습니다.

정보성 글을 덜어내고 일상 글을 가볍게 써보려 합니다.

더불어 '밀리의 서재' 밀리로드에도 동시 게재합니다. 작가님들의 '밀어주기' 덕분에 사막 같은 밀리로드에서 힘을 낼 수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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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리고 밀리로드에서 '입주지원 프로젝트'를 하고 있습니다. 작가님들, 함께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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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