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 뵙고 두 달이 채 안 됐는데 엄마는 더 야위어 계셨다. 엄마의 근황은 언니에게 수시로 받고 있었지만 예상을 앞섰다. 우리의 안심을 위해서 드시기 싫어도 한 숟가락 넘기면서 겨우겨우 버티고 계시구나 싶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틀 있다 나서려니 죄송한데 "벌써 가려고? 내가 실증 나서 그만 가라고 떠밀 때까지는 있어야지" 농담기 없이 말씀하셨다.
전에는 대문 앞까지 나오셔서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어 주셨는데 이제는 마당까지도 겨우 몇 발짝 떼보시다 안 되겠는지 의자에 풀썩 못 나가겠다고 손만 흔들어 보이셨다. 우리가 오갈 때마다 텅 빈 마음을 달래시는 것도 오로지 엄마 몫이었겠구나. 그 모습이 자꾸 밟힌다. 아이들이 시간이 안 돼서 같이 가지 못했던 것도 죄송했다. 일정이 되는대로 다시 꾸려보기로 하니 좀 위안이 된다.
엎치락뒤치락 새벽녘에 문득 산후조리 해주셨던 때가 생각났다. 그때 엄마 연세가 얼마였더라 헤아려 보았다. 서른여덟에 나를 낳으셨으니 내가 첫 아이를 낳았을 때 엄마는 예순일곱이셨구나. 그것을 한 번도 헤아려 보지 않았던 내 무심함에 새삼 놀랐다. 그럼 둘째 아이 때는 일흔둘이셨다는 것도 이제야 알게 됐다. 예순일곱도 일흔둘도 산후조리해 주시기엔 힘든 나이였음을 이제야 깨닫고 있었다.
바쁜 농사 일도 제쳐 두고 두 달, 한 달을 꼬박 채워주고 가셨었다. 미역국이 질릴까 봐 소고기 넣고 끓이다 들깻가루 넣고 끓였고, 굴을 넣거나 감자, 새우를 넣어 다양하게 끓여 주셨다. 아이가 밤낮이 바뀌어 잠을 못 자면 아이를 대신 안고 어르고 달랬다. 당신 딸을 더 자게 해 주려고 졸린 눈을 비비셨을 걸 알면서도 당연하게 받기만 했었다. 내 이기심은 엄마가 마냥 젊게 기억하게 했다.
남편이 출근할 때 쓰레기 봉지를 들고나가는 것을 보고 그저 감탄하셨던 것도 생각난다. 한량처럼 가장의 무게 엄마한테 떠넘기고 사라졌다 나타났다를 반복했던 아버지한테서 볼 수 없던 풍경이었다. 대부분의 가정에서 일상으로 일어나는 일에 감동을 받아 저런 남편이 어디 있냐고 남편한테 잘하라고 신신당부하셨었다. 딸의 삶이 자신과 달라서 안심하셨고 누려보지 못한 것에 대한 부러움도 좀 있었던 것 같다.
아버지한테 받지 못한 것만 생각했지 엄마에 삶이 얼마나 팍팍했으리라는 것을 잊을 때가 많았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엄마에 대한 고마움 애틋함을 어떤 식으로든 표현하며 살았던 것 같은데 고등학교 대학교를 보내면서 내 살기에 급급했다. 그러는 사이 엄마는 급속도로 늙고 계셨다. 이제는 기억이 흐려져 미더워하던 사위도 나와 연관 짖지 못하고 따로 온 사람이 되었고 안고 어르고 달랬던 손자 손녀의 이름도 기억을 못 하신다.
엄마에게 못해줬던 것만 기억나서 내내 쌉쌀하면서도 마음은 어느새 오늘 첫 출근하는 딸아이의 마음을 헤아리기에 바빠 있다. 기온이 떨어져서 춥지 않게 입고 갔는지, 당당하게 자리매김하기를 바라면서.. 엄마는 또 저만치 밀려나 있었다. 마음 한 번 통째로 엄마한테 내주는 일도 안 되니 난감하다. 이렇게 나이가 먹어서도 자식은 부모에 이르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