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저녁 선들선들을 지나 오싹 한기까지 느껴진다. 더운 여름을 방패 삼아 미뤄뒀던 일들이 저들끼리 순번을 정하고 나선다. 지루해하지 않고 기다려 줄 수 있지? 한꺼번에 밀려오지 말고 차근차근 하나씩 하자. 번호표를 나눠 주며 달래 본다. 이제는 한꺼번에 밀려온데도 순삭해 줄 노동력도 딸리니 재촉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한다. 다음으로 밀려나지만 않게 하겠다고 제법 현실적인 약속을 했다.
사실 난 줄 서는 게 싫다. 버스를 기다린다던지 질서를 위해서 당연한 것 말고는 아무리 맛집이어도 줄 서있으면 포기하고 만다. 그다지 시간을 잘 쓰는 편도 아니면서 괜한 데서 효율을 따지고 돌아 나온다. 내가 싫어하는 것을 시켜 놓고 여유자적 하지는 못해서 우선 바카라장 앞에 섰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보던 동화바카라까지 그대로 꽂혀 있다. 미련들과 마주한 기분이었다.
낙서 하나 없는 바카라들을 끈으로 묶어서 도서관으로 가져갔다. 바카라들은 이미 많아서 1층 카운터 옆 바카라장에 꽂아두면 필요한 사람들이 자유롭게 가져가는 방식이다. 아이들 이름으로 도서관 바카라장에 꽂히길 기대했다가 뻘쭘했지만 이 방법이 더 참신한 것 같았다. 버려지는 것보다 한 번 더 활용될 것에 뿌듯하기까지 했으니 이렇게도 나눌 수 있구나 오랜만이었다. 진즉 할 걸 구태의연한 후회는 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쓰던 바카라상과 함께 바카라장이 두 개 빠져나가고 나니 작았던 방이 꽤나 커 보였다. 이제는 변색된 벽지가 걸린다. 한 꺼풀 벗겨내고 보니 연달아서 순식간에 벌거숭이가 됐다. 보기 싫어서라도 도배지를 고르고 풀도 넉넉히 챙겨 왔다. 치수를 재고 오리고 풀칠까지 꼬박 하루가 걸렸다. 천정은 일요일에 남은 인력을 동원하기로 했다. 이만큼도 기대이상이다. 안 쓰던 근육들이 아우성 댔지만 성취감 비슷한 것이 더 컸다.
비워낸 자리를 넉넉하게 이리저리 배치하는 재미도 있다. 마무리가 되니 거실 한쪽 벽을 벗겨내고 있었다. 일이 커질 조짐이다. 가장 게으른 게 눈이고 가장 빠른 건 손이라는 말이 맞다. 하루 이틀이면 메꿔질 것이라 기대를 부풀리면 노동은 부수적이 된다. 그다음은 옷장을 비워낼 것이다. 아까워서, 한 번 더 쓸 것 같아서 남겨뒀던 것들이 짐이 되고 말았다.
소소한 것들이 며칠을 벼르고 치워야만 하는 묵은 짐이 돼서 시간과 노동을 바쳐야만 되는 굴레가 되고 말았다. 미련이 미련을 낳았다. 적절하게 쓰였으면 더 쓰이기를 바라지 말고 시효를 정하는 것이 이리도 어려웠을까. 정리가 끝나고 뿌듯함 뒤에 밀려오는 매번 당하는 기분은 뭔지.. 어이없지만 내 함정은 항상 나였다.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과해서 당분간은 모든 집기들이 버릴 것과 아닐 것으로만 보일 것 같다.
조금 과해도 그러는 편이 나을 것 같다. 매의 눈으로 일갈하고 나면 나만의 공간이 확보될 것이고 그 안에서 버킷 리스트가 하나씩 이뤄지게 될 것이니까. '숨은 가을 찾기'에서 언급했던 것들의 반은 이룬 셈이 됐다. 비로소 이뤄가는 맛을 느낄 참이다. 아직은 벗겨낸 거실 벽이 있고, 옷장이 내 손길을 기다리고 있긴 하지만 작정했으니 순삭 될 것이다. 맘껏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노동에도 박차를 가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될 것이니까.